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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많이 한 사람” 이라는 말은 적어도 우리 사회에선 칭찬으로 쓰는 말이지만, 때론 조소의 의미가 들어가기도 하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 후자로 쓰이냐하면, “저녀석, 고등학교때 공부 좀 했는데, 지금 사는 꼬라지 보게. 낄낄.” 과 같이 이야기할 때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이공계 출신자들의 꼴이 딱 그렇다. 열심히 공부해서 석사 박사학위를 따든가, 2년제,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뒤 산업현장이나 연구소에서 전문적인 경력을 쌓아도 마찬가지이다. 40대 초반의 10년차 박사 연구원의 연봉이 시중은행 은행원 평균연봉에 미치지 못하고, 그나마도 파리목숨이라 언제 자리가 날아갈 지 모른다. 이공계 출신이라고 다 박사인 게 아니고 박사가 그닥 위대한 딱지도 아니지만, 그 분야의 최고 학위자의 처지가 이 모양이나 다른 사람들의 처지를 쉽게 눈치챌 수 있다.
18세기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자연자원을 인간의 노동력과 기계의 힘으로 가공하여 부가가치를 만들었고, 제국주의적 국제질서하에서 불평등무역을 통한 식민지 자원과 노동력의 착취에 의해 일부 선진국으로의 부의 집중이 일어났다. 20세기 후반부터 세계는 자유무역에 의해 점차 단일시장화 되어가고, 인력과 재화의 이동을 막는 국경이 허물어져가고 있다.
거창하게 이야기 할 것도 없다. 전 세계에 보급된 10억대의 PC에 꼽혀있는 중앙처리장치는 미국의 인텔, AMD, 모토롤라등 몇 개 기업의 제품 뿐이고, 메모리는 삼성, 마이크론, 하이닉스 3개사가 70% 가까운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전세계 휴대전화의 80%는 노키아, 에릭슨, 삼성, 모토롤라 제품중 하나이다. 미국엔 자동차 회사가 2.5개가 있고, 한국엔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팔았다. 영국, 스웨덴, 이탈리아, 일본도 하나 이상의 자국 자동차기업을 외국에 팔아넘겼다. 21세기의 부는 어떠한 메커니즘에 의해 어떤 나라로 집중될 것인가?
이제는 세계 최첨단 최고급의 기술을 갖지 못한 회사는 도태된다. 아무리 값싸고 튼튼한 휴대전화를 만들어도 아날로그방식이라면 팔리지 않는다. 아무리 값싸고 고장없는 차를 만들어도 기계식 엔진에서 공해물질을 뿜는다면 형식승인조차 받을 수 없다. 개발한 회사가 독점적 권리를 갖는 신약이나 생명공학 생산물이라면 말할 필요조차 없다. 21세기의 부는 최고의 기술을 가진 기업에, 그 기업을 가진 국가에 집중된다.
제품의 부가가치는 더 이상 노동에서 나오지 않는다. 신기술의 부가가치는 수요자와 공급자의 합의에 따라 원가의 수백배까지 정해지지만, 신기술이 없는 추격그룹은 제조원가에서 기술료를 뺀 나머지 부분 즉 조립공정에서 아끼고 아껴 겨우 몇푼을 벌 뿐이다.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시점에, 한국은 때아닌 이공계기피현상을 겪고있다. 전국의 모든 의대가 최상위권 학생들을 싹쓸어가고, 명문 공대마저 미달되고, 멀쩡히 학교 잘 다니던 대학생들은 고시로, 편입으로, 재수로 빠져나가고 있다. 그나마 연구에 애착을 갖는 학생들은 외국으로 탈출하고 있다.
금년 초 인터넷 한겨레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었던 글들은 “이공계 출신에 대해 정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아 이렇게 된 것.”이란 내용이 많았다. 결국 과학기술인 스스로 권익찾기에 나섰고, 인터넷상에서 한국과학기술인연합 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한 사람의 과학기술 전문가가 만들어지기 위해선 대학부터 치더라도 10여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가 길러지는 동안 투자되는 실험실습비, 그가 사용하는 연구비는 만만치 않다. 수많은 국내외 학회에도 참가하여 배우고, 장단기 연수를 받기도 한다. 새발의 피 같은 액수이지만 그에게 지급되는 장학금과 생활보조금도 인문사회학도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많다.
이렇게 비싸게 길러낸 과학기술 전문인력이, 정작 취업시장에선 갑자기 헐값이 된다. 직장생활중에도 ‘큰 부가가치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되고, 연구원이나 교수가 되어도 ‘별 돈도 안되는 연구를 하는 사람’으로 인식되기 일쑤다.
대체 뭐가 잘못되었길래 이 ‘비싼’ 인력이 하루아침에 ‘헐값’으로 둔갑하는 것인가? 갑자기 바보가 되거나 10여년간 공부한 지식을 까먹고 10여년간 익힌 기술을 잊어먹는단 말인가?
경제적 기득권층-차마 자본가라 부르진 않겠다-이 파악한 이러한 ‘국가적 낭비’의 원인은 항상 “대학이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키워내지 못한다.” 는 것이다. 그들은 “기업이 원하는 맞춤형 인력을 내어 놓아라. 인재 리콜제를 통해 재교육해달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부품…아니 실수다. 사람을 만들어달라.” 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짜 원인은 그것이 아니다. 비싼 돈 들여 기른 인재를 저부가가치적으로 소모하는 ‘국가적 낭비’는 애초에 없다. 그들의 지식과 기술은 결코 값싸지 않으며, 그들의 능력은 세계적 수준이다. 외국에만 나가면 언론보도로나 접하게 되는 ‘한인과학자’들이 있다. 그들이 미국의 공기를 마시는 순간 갑자기 IQ가 두 배가 되고 지식이 세 배로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국내에서 발표되는 논문의 수량과 수준도 세계적 수준이다.(최소한 정치수준보다는 훨씬 높다) 값비싼 지식과 기술에 헐값을 지불함으로써 기업과 국가 스스로 낭비를 일으킨 것 뿐이다. 남이 100원들여 만든 물건을 10원에 후려쳐 사오고선 “저건 10원짜리 물건이다. 망가져도 그만이고, 대충 쓰다 새거 사야지.” 라고 말하는 꼴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과학기술인 스스로의 책임이 매우 크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인류 전체가 공유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과학자들은 항상 자신의 연구를 공짜로 알리는 데에 익숙하며, 주변과 소통하기보다는 자신의 연구세계에 몰입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기술자들은 자신의 기술을 ‘배운 것’이라며 겸손해 하는 경우가 많다. 국가와 선배의 덕으로 배워온 기술이니 동료와 후배들에게, 심지어 자신의 회사에 정당한 값을 받지 않고 공짜로 넘겨주는 경우가 많다.
신문사 기자나, 증권사 분석가들이 최신 과학기술에 대해 모르는 것이 생기면, 별 생각 없이 평소 알고 지내는 전문가나 교수에게 전화해서 물어본다. 질문을 받은 과학기술자는 ‘와. 내 지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네.’ 라고 뿌듯해하면서 자신이 십수년간 힘들게 쌓아올린 과학지식과 비젼을 흔쾌히 알려준다. “다음에 밥이나 한번 사라.” 라고 하면서. 공짜로 지식을 나누는 것이 과학자의 소명이자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인의 권익증진을 위해 과감한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대중을 위한 과학의 전파엔 인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과학기술인의 머f릿속에 든 지식과 손에 밴 기술이 다른 이의 경제활동에 사용된다면 그 대가를 정당히 지불받아야 한다. 고도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상품화되고 있는 마당에,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게도 상품화의 인식조차 없는 분야가 과학 지식이다. 과학자들은 자신의 지식을 어떻게 포장해야 상품이 되는지조차 모른다. 기껏해야 어떻게 포장해야 정부로부터 연구비를 잘 따낼 수 있나를 알 뿐이다.
외부의 질문을 받고 나서야 대답을 해주면, 그것은 과학자의 지식이라는 원자재를 외부의 질문자가 맘대로 가공하여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원자재의 가격은 ‘밥 한끼’이지만 가공물의 부가가치는 때론 수십만원이, 때론 수백억원이 될 수도 있다. “교수님, 그 A사가 개발했다는 신기술 있잖습니까. 그거 말이 되는건가요?” 라는 질문에 “하하! 내가 보기엔 눈가리고 아웅이야! 그게 성공할리도 없고, 돈도 안될거요.” 라고 답한다면 투자자는 A사로부터 자금을 회수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자신의 연구분야가 미래에 어떻게 돈 되는 분야와 연결될 것인지를 먼저 파악하고, 그 분야의 비젼을 내다보고 미리 보고서를 작성해 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분야가 전망이 있겠습니까?” 란 질문에, “마침 내가 만든 보고서가 있습니다만, 한 부에 백만원입니다. 사서 보시겠습니까?” 라고 대답하면 된다. 과학기술자의 전문지식은 분명 값싸지 않다. 원자재의 형태로 갖고 묵혀 둘 것인지, 적극적으로 포장해서 상품가치를 갖도록 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과학기술자의 손에 달려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몇 개의 경제연구소가 있으며, 연구원들이 보고서를 내고, 연구소는 그 보고서를 팔아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다. 과학기술분야의 보고서는 경제연구소에서 ‘동향 보고’ 식으로 선진국 유행이나 좀 챙겨서 그나마 일년에 몇번 나올 뿐이다. 최신 과학기술분야 정보를 가공해서 파는 제대로 된 연구소도 있어야 한다.
금융산업이 발달한 미국에선 투자은행에서 근무하는 애널리스트의 상당수는 이공계 박사학위 소지자이다. 가까운 미래에 돈이 될 기술을 찾아 투자하여 대박을 내기 위해 끊임없이 먹이를 찾는 헌터들이다. 그들이 발굴한 ‘제대로 된 기술’은 결국 대박을 터뜨려 엄청난 부를 창출한다. 그 전문가들조차 모든 첨단 과학기술을 다 아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 거의 매일같이 열리는 첨단 과학기술관련 세미나의 참가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소수의 관련자만 초청해서 외딴 호텔에서 열리는 최첨단기술 세미나는 3박4일에 1인당 1만불 이상의 참가비를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누구나 신청만 하면 참가할 수 있는 학회에서도 발표논문집의 가격은 100불을 호가한다. 세계적인 경영 컨설팅회사 매킨지는 매년 50% 상당의 신입 컨설턴트를 이공계출신으로 뽑는다. 미국의 과학기술자들은 자신의 지식이 돈이 ‘직접’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지식을 파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한국에서 과학기술 전문인력으로 취직을 하면, 의레 받는 질문이 있다. “전공한 분야와 좀 다른데, 이 일도 할 수 있나?” 가 바로 그것이다. 누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인가? 결국 기업은 “우리가 딱 원하는 인재도 아닌데, 써 주지 뭐. 리콜이나 해서 재교육받고 오면 좋겠구만!” 이라고 건방지게 말한다.
과학기술인은 자신의 지식에 당당하게 제 값을 요구해야 한다. 취업을 위한 면접에서도 기업이 원하는 분야의 지식을 알고 있다고 땀흘리며 변명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전공분야를 프리젠테이션하고, 그것을 왜 선택했으며 왜 가치있는 일인지, 미래에 어떠한 부가가치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잘 포장하여 설명해야한다. “내가 이렇게 가치 있는 일을 했지만, 너희 회사에서 당장은 이 일을 하지 않는다니, 그 일부터 잘 수행해 주겠다. 그러나 나는 이만큼 능력있는 사람이니 정당한 대우를 달라.” 이렇게 당당히 주장해야 한다.
과학기술계 사람들끼리 하는 말 중에 과학기술자의 능력을 무협지에 빗대어 ‘내공’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 석사 1년차의 내공과 포스트닥의 내공은 분명히 다르다. 한 분야에서 비전공자와 전공자의 내공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10여년 힘들여 쌓은 이 내공을 왜 무시하고 평가절하하는가? 자신의 지식과 기술의 상품가치를 올바로 매길 줄 아는 것이야말로 과학기술인 권익 향상을 위한 첫 걸음이며, 이공계 기피현상 극복을 위한 첫 단추이다.
지식을 활용하는 것은 연구소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인력 저수지에서 헐값에 팔려 전공분야와 무관한 연구를 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있는 일이 많이 있다. 과학 지식도 ‘직접’ 상품화될 수 있다. 당신의 지식은 결코 값싸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