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breakin Things

Posted
Filed under 살아가기, 생각하기

간밤에 CS443 조교일로 Hadoop 클러스터 세팅하다가 JVM Heap 크기 설정 문제로 삽질하느라 밤새는 바람에 좀 늦긴 했지만 어쨌든 첫 TEDxKAIST 행사에 다녀왔다. 아무래도 클러스터 세팅도 빨리 해야 하는 일이고 그래서 갈까말까 고민했지만, 공지 메일을 보니 대기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안올 사람은 최대한 빨리 연락달라는 문구를 보고 그냥 안 가버리면 대기자나 주최측에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 것 같아 늦게라도 갔다.

원래 공지된 프로그램과 순서가 조금 달라졌는데, 첫 순서만 이민화 교수님으로 바뀐 두번째 세션부터는 쭉 다 들을 수 있었다. 이번 학기에 CEO 세미나 들으려다 말았는데(수강하면 조별 토론 준비해야 되고 귀찮아서 시간 될 때 청강만 하러 갈 생각) 첫시간에 나오신 분이 이민화 교수님이었다. 그땐 별다른 인상을 못 받았는데 오늘 발표하는 걸 보니 이분도 상당한 내공(?)의 소유자신 것 같았다. 아무튼 들은 것들 중에 기억에 남는 발표들에 대해 정리해보면 이렇다.

Homo Mobiliance (이민화)

사실 중간부터 들어서 전체 내용을 다 못 보긴 했지만, 대략 스마트폰으로 인한 모바일 라이프를 통해 사람들은 더 다양한 소셜네트워크 속에서 다양한 모습(다중인격)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고, 스마트폰은 그런 모습들의 아바타로서 작동하게 되는 미래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 연구실에서 하는 소셜네트웍 연구 중에 community structure를 node 중심이 아닌 edge 중심으로 바라보는 관점으로 하는 것이 있는데, 어쩌면 이분이 말씀하신 다중인격 개념이 그와 맞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Sweat the small stuff (녹화영상, Rory Sutherland)

요즘 나오는 말들 중에 '디테일에 집중하라' 이런 것이 있는데(책 이름이었던가?), 딱 그것을 설명해주는 내용이었다. 행동경제학이니 이런 말을 붙여 설명하긴 했지만, 결국 사람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생각보다 큰 '규모'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부나 권력자들이 많은 예산으로 뭔가 큰 규모의 일을 벌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흔히 말하는 '전시성 행정'이 딱 그런 예다), 실제로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거나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훨씬 저렴한 비용의 아이디어로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로 든 것은 유로스타의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 60억 파운드를 들이는 것보다 10억 파운드만 들여서 예쁜 걸(...)들이 와인을 서빙하게 하면 속도가 더 느려도 사람들은 만족할 것이라는 것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예보다는 엘레베이터에 거울을 설치하거나 투명하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게 만듬으로써 타고 있는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걸 예로 들었으면 더 낫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했다. 아무튼, '디테일'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내용은 맘에 들었다.

Experiencing Science and Happiness (박성동 @SATRECi)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고 카이스트 인공위성 연구센터와 소형위성 개발업체 SATRECi를 만드신 분의 발표였다. (기숙사 화장실마다 붙어있는, 카이스트의 전설 시리즈 중 첫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나 할까.) 1989년 영국에 가게 된 것이 교양분관에서 대학3호관으로 걸어가던 길에 있는 공지를 보고 한 것이었다든지, 그로부터 20년을 기념하여 어은동(...) 모 술집에 모여 찍은 사진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보니 그런 '전설'의 사람들이 먼발치에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야기의 내용은, SATRECi로 많은 돈도 벌었고 인공위성 연구센터에서 나올 때 많은 고민도 했었고, 뭐 이런 경험들과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선 자기가 원하는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Drive (녹화영상, Dan Pink)

화이트보드 같은 곳에 검정색과 빨간색 마커로 손으로 만화 같은 느낌의 그림과 글자를 그리는 것을 녹화하여 빨리 재생시키고 거기에 나레이션을 담은 형식의 영상이었다. (그림체는 전형적인 미국만화--예를 들면 Ph.D Comics 같은 느낌.) 제목만 보고 무슨 내용인가 했는데, 단순한 일은 보상이 많을수록 동기부여가 쉽게 되지만 복잡하고 창조력을 요구하는 일은 보상이 많다고 동기부여가 꼭 잘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예로 든 것이 오픈소스(...)였는데,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과정은 고도의 사고력을 요하고 또 실제로 오픈소스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본업을 따로 가지고 있는데도 그런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재미와 자기주도성을 이유로 꼽았다. 나도 이에 동의하지만, 사실 좀더 좋은 직장으로의 취업과 같이, name value를 높이기 위한 어떤 사심(私心)에 의한 동기도 크다고 생각하고 있고, 이건 심지어 Needlworks 내에서도 인정하는 분위기다. 아무튼, 이 이야기의 결론은 그런 동기부여 방법을 잘 생각하고 활용해야겠다는 것이었다.

It's you, KAIST: let's change the world! (여운승 @CT)

공대생 유머(ㅠㅠ)로 시작해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발표였다. 처음에 단상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정말 교수님 맞나 싶을 정도로 젊기도 하고, 약간 어눌한 느낌으로 시작해서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보면 사람들한테 가장 강하게 남은 발표가 아닐까 싶다. 공대생의 비참함(...)을 한참 얘기하다가, 또 공대생에서 출발했지만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도 하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이 있는 사람은 결국 엔지니어라는 것을 이야기하며, 삐딱한--즐길 줄 아는--엔지니어로서 잘 살아간다면, 혹은 엔지니어 배경을 다른 분야에서 잘 활용한다면 그것 또한 하나의 행복한 삶 아니겠는가 하는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발표 중간에, 단상 위에 놓여있던 의자를 두고 갑자기 이게 왜 여기 놓여있는지 모르겠다며 '삐딱한'이란 말의 예를 몸소 보여주어 관중의 폭소를 샀는데, 순발력 있는 발표 기술이 상당히 돋보였다.

It's good to be unhappy (Don Norman)

컴퓨터로 준비된 영상이나 슬라이드 없이, 칠판에 그린 그림 몇 개와 단어 몇 개로 훌륭하게 소화해낸 인상깊은 발표였다. 처음에 무선프레젠터의 '다음 슬라이드' 버튼이 위여야 하는지 아래여야 하는지, 컴퓨터 GUI의 스크롤바를 움직였을 때 내용이 움직이는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지--처음 GUI 개발 당시 이 문제로 3년 동안이나 토론했다고 한다. 결과는 보다시피 우리에게 익숙한 그것이지만 정답은 없다--와 같은 사용자 인터페이스 이야기를 통해 'point of view'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잠시 불만족스럽고 불행한 상황에 있더라도 긍정적인 관점으로 살아가다보면 궁극적으로는 만족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였다. 특히 사람은 어느 정도의 긴장 상태에 있어야 보다 집중하고 좋은 효율로 일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생각해보고 상황에 따라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활용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

모든 발표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에는 트위터를 통해 받은 질문들과 관중들의 질문들을 바탕으로 발표자들의 패널토의가 있었다. 여러 이야기들이 나왔는데, 무언가 일을 이뤄가려면 좁고 깊은 전문성보다는 넓게 아는 것이 더 도움이 되더라라는 것과 학생 때 가능하면 많은 경험을 해보아라 하는 내용들이었다. 카이스트 학생들이 리더십 같은 쪽으로 더 많이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내용에 대해 노영해 교수님은 TEDxKAIST 같은 행사가 이렇게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성공리에 개최된 것을 보면 충분히 이미 리더십이 있는 것 아니냐고 칭찬(?)을 하시기도 했다.

알고봤더니 행사 스탭들 중에도 아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홈페이지에서 봤을 땐 잘 모르겠더니만 ㅋㅋ), 아는 친구들이나 후배들도 와서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요즘 돌아가는 이야기도 해서 더 좋았다. 마지막에 after party에서는 우주인 이소연씨가 우주에 다녀온 경험을 토대로 '우주로의 일탈'을 간단하게 발표했는데, 우주인으로서도 하나에 집중한 전문지식보다는 이런저런 분야에 대해 다양하게 알고 있던 것이 더 도움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생존부터 과학실험까지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하는 현재 우주기술의 수준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되지만, 나는 미래에 일반인들이 우주에 손쉽게 왔다갔다 하는 세상이 되면 그땐 다시 거꾸로 전문화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긴 하다.)

뭐, 태터툴즈 오픈하우스부터 시작해서 VLAAH DAY라든지 태터캠프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 이야기 나누는 자리에 나름대로 좀 다니다보니 사실 위에 나온 이야기들은 어떻게 보면 이미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그래도 직접 들으면 온라인으로 볼 때보다 확실히 motivating되고 더 감동으로 와닿긴 하지만, 요즘은 발표 보면서 그 한순간 감동받는 것보다는 실제로 살면서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또 더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특히, Don Norman 발표에서, 급한 일에 치이다 보면 중요한 일을 못한다며 중요한 일을 하려면 매일 일정시간 다른 모든 일을 'block'하고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며 특히 책 쓰는(...) 일이 그렇다는 얘길 했는데, 나도 책을 쓰려다 당장의 학업 때문에 계속 밀리고 밀려서 '때맞춰' 책을 못 낸 것이 매우 아쉬운 터라 큰 공감으로 와닿았다. 학부 때도 그게 힘들었는데 대학원생인 지금은 더 힘들 것 같기도 하고. ㅠㅠ 아무튼 좋은 이야기 많이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천해야만 그것이 정말 좋은 가치로 다가올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이제 다시 클러스터 세팅 살집하러...;

ps. 스탭 중 한분에게 물어보니, TEDxKAIST는 연 1회 이상 앞으로도 계속 지속할 생각이라고 한다. 오늘 못 왔어도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듯. 그리고 발표 내용은 나중에 웹으로도 올려준다고 함.

Posted
Filed under 살아가기, 생각하기

가끔 집에 왔다가 TV에서 하는 버라이어티 쇼 같은 걸 보면 연예인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요번에 본 것 중에는 송대관의 첫날밤 이야기가 있었다. 첫날밤을 어디서 어떻게 보냈나 퀴즈를 냈는데, 대부분의 예상과 달리 낚시터에서 보냈다는 것이다. 밤에 비가 오자 낚시터 근처 논밭에 세워져있는 추수 끝난 볏짚더미로 가서 안을 파내고 움막처럼 만들어 거기서 열렬한 밤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이거 완전 소나기인데'라며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역사라는 말은 뭔가 거대한 담론이나 흐름(시류, 조류, 대세 따위로 표현되는)의 느낌을 주지만, 우리 주변을 잘 살펴보면 각 개인들도 각자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앞의 송대관씨 첫날밤 얘기처럼, 평범할 것 같은 와중에도 '나름대로' 파란만장한 상황을 겪기도 한다. 삶이 곧 드라마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번은 연구실 선배가 요세미티 공원 산행하다 겪은 삽질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정말 그렇게 끔찍한 여행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파란만장했다.

사람이 살아온 과정이 그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다고 한다. 휴가 둘째날 부모님과 함께 삼겹살 구워먹고서 연락을 받고 아버지 친구를 함께 만나러 나갔었는데, 그곳 술집 사장님 말씀 중에 '나이 오십을 먹으면 사람 얼굴만 봐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되는 것 같다'고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그래서 첫인상이 중요한 것 아닐까? 같은 것을 두고도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고 생각한다지만, 어쩌면 사람 얼굴을 봤을 때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구나 하는 건 다들 비슷하게 느끼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론,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는 단순하고 평화로울 수 있고, 육체적으로는 편한데 정신적으로 압박과 스트레스에 시달릴 수 있듯이, 각 개인의 삶이 가진 다양한 모습들을 겉으로만 봐서는 알기 어려운 면도 또한 있다.

스팍스 동아리 선배 중 한분이 얼마 전 갑자기 장문의 메일을 돌리셨다. 졸업 후 3년 넘게 회사 다니시다가 홍대 앞에서 아는 사람과 함께 술집을 차려서 동업하다가는 갑자기 인도에 3개월 동안 다녀온다며 이후 계획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분처럼, 이따금 '이런 과정을 밟아온 사람이라면 이렇게 살겠지'하는 고정관념을 깨버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삶에 정답이 없다는 말을 다들 너무 쉽게 하지만, 막상 그러기는 쉽지 않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대단해보이는 것 같다. 스웨덴 교환학생 다녀오면서 얻은 것 중 하나가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그냥 막연히 학교 졸업하고 취직하는 게 아니라 하고자 하면 뭐든지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일종의 자신감이자 기대감이었다.

다들 자기 자신의 삶이 특별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도 그만큼 특별하다고 느끼게 될 때--여기서 특별함은 인도주의적 소중함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그 무엇을 뜻한다--사람을 좀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나아가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닐는지.

Posted
Filed under 살아가기, 생각하기

개장 휴업 상태인 블로그를 어떻게든 RSS 리더에서 삭제당하지 않도록(...) 만들어보고자 언제나 할말 없을 때 하는 근황 포스팅. 최근 뭘 하며 지내나 한번 적어본다.

연구!

대학원생이니 당연히 일순위는 연구다. "연구"가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느끼는 바, 생각하는 바가 다른 것 같지만 어쨌든 형식 상 연구라는 걸 하고는 있다. (...)

첨단망 연구실(그렇다, 한글 이름은 이렇게 생겼다.)에 들어오고 어언 4개월이 다 되어가는데, 이중에서 약 두 달 동안의 탐색 기간을 거쳤다. 현재는 선배들의 올해 SIGCOMM 논문으로 나간 PacketShader의 후속 프로젝트를 이어서 하는 것이 메인이고, 사이드로는 트위터 및 소셜네트워크 분석 관련 프로젝트 미팅에 계속 참석하고 관련 논문들을 읽어나가고 있다. PacketShader의 후속 연구로는 SSL/IPSec 기능을 GPU로 가속하는 것과 이것을 실제 라우터로 사용할 수 있도록 control plane을 통합하는 것이 함께 진행 중이다. 전자는 이번에 SIGCOMM Poster로 발표될 예정이고, 나는 후자에 참여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 쪽으로는 네트워크 구조로부터 커뮤니티를 발견하고 그 dynamics를 분석하는 일을 하는데, 물리학과의 정하웅 교수님 연구실과 함께 공동연구를 하고 있고, 서울대 사회학과의 장덕진 교수님이나 사회발전연구소 이원재 박사님 등으로부터도 도움을 받고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우리 연구실에서 진행해온 소셜네트워크 분석으로부터 얻은 통찰이나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매우 큰 규모의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구축할 때의 시스템 이슈들을 들여다보고 싶은데, 이것을 제대로 하려면 아직 알아야 할 것이나 논문을 읽어야 할 것이 더 많다고 생각되어 아마 박사과정에 진학하게 된다면 본격적으로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정작 그때 가면 다른 주제를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옛날부터 큰 규모의 코드 덩어리를 보며 시스템을 이해하고 개발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 잘 해왔기 때문에--학부 성적을 봐도 너무 극명하게 드러난다--시스템 개발에 더 가까운 PacketShader 프로젝트를 우선 메인으로 하기로 한 것이다.

지금까지 해보고 느낀 점이라면 학부 때와 달리 스스로 찾아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얘긴가?) 뭐 회사를 가도 마찬가지겠지만, 회사에서는 돈이라는 강력한 동인이 눈앞에 놓여지는 데 비하여(내가 직접 받는 월급 같은 것뿐만 아니라 이걸 하면 회사가 얼마나 벌 것이다 하는), 그야말로 학문적 호기심과 인류 공동의 이익을 위해 아이디어를 짜내야 한다는 것이 말은 멋있지만 생각보다 더 괴로운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누가 마련해놓은 정답이 없을 때 스스로 찾고 또 찾는(그래서 re-search일 것이다) 그 과정... 아직 나는 본격 시작했다고 보긴 힘들지만 선배들이 그런 과정을 겪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니 생각만 하던 것과는 또 다르더라.

약간 번외의 이야기인데, 연구를 하면서 오픈소스의 중요성을 많이 느낀다. 세상에 리눅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시스템 연구들은 도대체 어떻게 했을까? 지금처럼 여러 사람들이 많이 참여할 수 있었을까?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다. 누구나 소스코드를 보고 고치고 다시 배포할 수 있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처음 낸 사람들은 정말 인류 역사에 엄청난 공헌을 한 것이다. 앞으로 백년, 이백년이 지나면 오픈소스는 어떤 평가를 받게 되고 인류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자못 궁금하다.

성가대

연구 다음으로 활발히 하는 것은 얼마 전 포스팅에서도 언급했던 성가대다. 성가대에 처음 들어간 것은 벌써 8주 정도 되었는데 중간에 청년캠프 등으로 예비단원 교육이 미뤄지는 바람에 지난 주말에서야 6주짜리 예비단원 교육을 완료하고 정식단원이 되었다.

중학교 때 심한 변성기를 겪으면서 사실상 노래가 불가능한 상황을 몇 년 겪은 후로 내가 노래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보지 못했다가 학부 때 실내악 앙상블 수업을 들으며 아카펠라에 테너 파트로 참여하면서 노래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는 기쁨이 은근히 마음 속에 남아있었는데, 요즘 자주 치지 못하는 피아노를 대신하여 내 음악적 욕구를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게 채워주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종교에 대한 회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또한 동시에 내 삶의 중심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하느님 안에서 두 배의 기도라 불리는 성가로 미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기쁨 또한 매우 큼은 물론이다.

성가대를 하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가, 그냥 일반 신자로 미사만 다닐 땐 몰랐던 것으로, 하나의 미사를 위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의 봉사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가대 연습이 미사 전 2시간 넘게 이어지는데, 처음엔 성가대밖에 없지만 한두 사람씩 미리 와서 기도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고 전례부와 복사단이 기도하며 미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무엇이 이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런 댓가 없이 한 마음으로 봉사할 수 있게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각자의 내적인 동기는 다양하겠지만, 세상적 기준으로는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하느님과 예수님을 향한 찬양과 제사를 드리는 모습은 왠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가끔, 너무 덥다든지 악천후가 이어진다든지 연구실 사람들하고 게임(...)에 말린다든지 하면 성가대 가는 것이 귀찮아질 때도 있지만, 일단 가면 정말 그 시간만큼은 후회하지 않을 꽉 찬 시간이 되는 것이 참 좋다.

지난 토요일에는 성가대 내부 커플의 결혼식이 있었는데, 신랑님이 사는 곳이 내가 초등학교 시절 대부분을 보낸 개포동 5단지인지라(!) 개포동성당에서 혼인미사를 하기도 했다. 당연히 성가대의 큰 행사인만큼 축가도 부르게 되었고. 신앙에 대한 회의를 시작한 곳이기도 하지만 어렸을 때의 순수한 신앙생활과 첫영성체의 기억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해서 감회가 새로웠다. 15년 전의 기억으로 멈춰있던 곳이 갑자기 현재의 기억--현재의 시간과 지금 알고 지내는 사람들을 포함하는--으로 전이하였다.

내가 성가대 들어온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엔 결혼하신 두 분과 친하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함께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축하에 직접 참여한다는 것 자체로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여기서 '가장'이라는 것은 외적으로 결혼식 때 가장 많은 치장을 하고 가장 젊고 활기찰 때의 모습이라는 점도 있지만, 모든 사람들로부터 축하와 축복을 받는 자리로서 그 자리에 선 사람의 모습이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 그리고 결혼은 연애의 완성이지만 삶을 가꾸어갈 사랑을 통해 다른 의미로 더욱 아름다워질 앞날에 대해 가득 찬 기대감을 나타낸다는 의미에서의 최상급이다.) 축가 전주 동안 신부가 신랑에게 편지를 읽어주고, 긴장한 탓에 가사를 틀려가면서도 끝까지 눈물 글썽이며 1절 부르는 모습을 보고 2절을 이어부르는데 괜히 나도 눈물이 났다. 이런 경험도 성가대가 아니었으면 해보기 힘들지 않았을까?

텍스트큐브

여러 이유로 니들웍스 멤버분들이 다들 적극적인 참여가 힘든 상황이 되어 그럭저럭 유지는 하고 있지만 예전처럼 활발하게 개발이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다. 사실 그동안 블로그 저작도구라는 틀 안에서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상당 부분 다 해봤기에, 새롭고 흥미로운 것보다는 유지보수나 리팩토링과 같이 상대적으로 지루한 작업들이 더 많이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건 아무래도 본업이 따로 있는 사람들이 하기엔 힘들어 보인다.

그래서 니들웍스의 다음 프로젝트로는 무엇을 하면 좋을지에 대해 이런저런 아이디어도 내보고, 앞으로 니들웍스와 태터네트워크재단이 나아갈 방향 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이런 것들에 대한 고민이 이어지는 중이다. 그 연장선에서 이번 달 21일에 열리는 제8회 태터캠프는 '미래'를 주제로 비교적 소수의 인원을 모아놓고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직 할 수 없지만--또 보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나기도 해서--어쨌든 텍스트큐브를 통해 나름대로 인류와 세계에 공헌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기에, 텍스트큐브 프로젝트는 내 개인적으로는 참 보람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나 혼자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강한' 사람들 여럿과 함께 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그런 사람들 틈에 끼어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

Posted
Filed under 컴퓨터

내가 그동안 했던 게임들을 꼽으라면 저 옛날의 커맨드앤컨커 시리즈(오리지날, 레드얼럿, 타이베리안선), 토탈어나이얼레이션(Total Annihilation), 스타크래프트가 있겠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주로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RTS) 장르를 즐겨왔고 실제로 본격적인 맵 제작은 거의 안 했지만 맵에디터가 있거나 혹은 내가 맵에디터를 만들 수 있는(!) 게임들을 주로 했다. RPG 류도 디아블로2 같은 건 조금 만져보긴 했었는데 노가다 뛰고 시간 투자가 많이 들어가는 것이 싫어서 거의 해보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토탈어나이얼레이션은 중학생 때 유닛을 만들어보겠다고 전용 AI 스크립트 언어까지 공부하다가 실패한 기억이 있다. 그러나 내가 그런 열정을 보이는 것과는 상관 없이(?) 그만 이 게임 제작사인 Cavedog이 망해버려서(...) 프로듀서였던 크리스 테일러라는 사람이 나중에 Gas Powered Games로 옮겨가 슈프림커맨더(Supreme Commander)를 개발한다는 소식을 듣고 근 10년 동안 즐기던 토탈을 접고 무려 한정판 패키지를 지르기도 했다. 이후 관련 게임 커뮤니티를 개인 서버에 계속 호스팅해오고 있기도 하다.

다만 슈프림커맨더의 결정적 단점이라면 한 판을 플레이하는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린다는 점으로, 사람들과 2v2 이상 멀티를 하면 1시간에서 길어지는 경우 2~3시간까지 걸리기도 한다. 특히나 우리나라에서는 20~30분이면 한 판이 끝나는 스타크래프트에 익숙하고 사람들 성격도 급해서인지 매우 인기가 없었다. (첫번째 릴리즈는 국내 유통사를 통해 공식발매가 되었는데 별로 많이 안 팔렸는지 확장팩과 더 이후에 나온 슈프림커맨더2는 국내 발매조차 되지 않았다. 결국 구매대행을 이용하거나 STEAM을 이용해 달러 결제하고 온라인 구입해야 했다.)

하지만 슈프림커맨더 이후로는 대학 생활에 한창 바빠서(2007년 봄에 출시되었는데 이때가 가장 바쁜 시기중 하나였다.) 무려 클로즈베타부터 게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만년 늅(...) 상태로 남아있었고, 따라서 게임에 돈을 꽤나 쏟아부었으면서도1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임 자체도 뭔가 다른 생산적인 활동에 밀려서 거의 하지 않았고 말이다.

...그러다가 최근에 주변 사람들의 소개로 시작한 게임이 바로 League of Legends(이하 LOL)이다.;;;

사람들이 "DOTA류의 게임" 또는 "DOTA 만든 사람들이 만든 게임"이라고 하는데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알고보니 워크래프트3에서 사람들이 "카오스"라는 유즈맵을 하는 걸 본 적이 몇 번 있는데(내가 있던 로봇 동아리 미스터에서 사람들끼리 동방에서 참 많이도 했었다. 나는 한번도 안 해봤지만.) 이게 그런 방식의 게임이라는 거다.

내가 해왔던 RTS들은 제한된 크기의 전장(맵) 안에서 지형지물을 이용하고 자원을 채취하여 건물과 유닛을 생산해 서로 싸우는 방식이었는데, DOTA에서부터 이어진 LOL은 제한된 크기의 전장을 이용한다는 점은 같으나 자원 채취와 생산이라는 개념이 없다. (굳이 말하자면 적을 죽일 때 버는 돈이 자원이랄 수는 있겠다) 다양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는 RTS에 비해 판타지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으로, 플레이어들의 의지와 상관 없이 양측 진영에서 자동으로 생성되어 서로 싸우는 미니온들이라는 작은 병사들이 존재하고, 여기에 플레이어들은 각자 한 명의 영웅을 맡아 미니온들을 돕거나 상대편 영웅들과 싸우는 방식이다. 영웅들은 각종 스킬과 마법을 사용할 수 있고 게임 중 번 돈으로 아이템을 사서 능력치를 자기 입맛에 맞게 키울 수 있다.

한동안 말려서 하다가(...) 가만 돌아보며 재미 요소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렇다.

  • 무조건 하나의 영웅만 컨트롤한다. 다른 유닛을 선택한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영웅에 더욱 집중·이입할 수 있게 된다. 이점은 RPG와 유사하다.
  • 꽤나 잘 설계된 온라인 매치 시스템 덕분에, 혼자 게임에 참여할 경우(3v3 또는 5v5밖에 없다) 자기 수준에 맞는 사람들과 플레이할 수 있다. 다만 미리 친구들끼리 팀을 짜는 경우는 팀웍 advantage 때문에 좀더 어려운 상대를 만나게 해준다. 따라서 적절한 재미와 난이도를 보장해준다. (이것은 칙센트미하이 교수가 말했던 flow의 기본 조건이기도 하다.)
  • 영웅마다 권장되는 아이템들이 있긴 하지만 무슨 영웅을 하든 어떤 아이템을 살지에 대한 제약이 없다. 따라서 자기 입맛에 맞게 영웅을 성장시킬 수 있다.
  • 영웅마다 스킬과 마법에 다양한 내부 능력치들이 존재하여 서로 상성을 이루도록 되어 있다. 일반 공격 데미지와 마법 데미지가 따로 있고, 일시적으로 상대 능력치나 특성(방어력 등)을 하강시킨다든지, 아이템을 통해 영웅별 특수 능력의 효과(ability point)를 더욱 극대화한다든지 하는 다양한 조합이 있어서 쉽게 질리지 않는다.
  • 현재 제공되고 있는 전장의 종류가 3v3용 하나와 5v5용 하나 단 2개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중간에 숨는 수풀 지형이나 벽에 따른 시야 확보의 제한, 이동거리에 따른 영웅별 유불리 등이 섬세하게 반영되어 있어 다양한 전략이 가능하다. 특히 '정글링'이라고 하여 NPC 몹들을 잡아 특수능력치를 얻는 등 부가 요소들을 제공한다.
  • 기본적으로 매 게임을 시작할 때 모든 사람의 영웅이 레벨 1에서 아무 아이템이 없는 상태로 똑같이 시작하되, 플레이어(LOL 내에서는 summoner라는 용어를 씀)가 게임을 할 때마다 얻는 별도의 경험치를 통해 플레이어가 어떤 영웅을 하든지 상관 없이 적용되는 특수 아이템들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이에 의한 영향은 상당히 미미하기 때문에 아주 고렙 플레이어들끼리 치열하게 붙는 상황이 아니라면 게임 자체는 거의 평등한 조건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즉, 앞서 언급한 온라인 매치 시스템과 함께 이러한 요소가 초보자가 쉽게 게임에 빠져들 수 있도록 하고 있다.
  •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평등성 때문에, 같은 영웅 캐릭터를 하더라도 각 게임마다 팀원 또는 상대편이 어떤 사람들이 되었는지 어떤 캐릭터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자신의 영웅을 완전히 다르게 성장시키고 다른 방식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 이것이 이 게임을 탐구하게 만드는 주요 요소이다. (이 또한 '너무 단순하지는 않다' 내지는 '약간의 도전 정신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flow의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스타크래프트는 유닛 상성이 있어서 어느 정도 이를 이용한 조합적 플레이가 가능하지만, 토탈에 그나마 있었던 다양한 유닛의 특성이 슈프림커맨더에 와서는 무조건 물량전 위주로 바뀌는 바람에 뭔가 머리쓰는 재미보다는 빌드오더를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해지고 빠른 컨트롤과 많은 플레이 경험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게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없었던 나로서는 뒤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LOL은 내가 매우 초보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즉각적으로 흥미를 가질 수 있었다. 그 이유로 아이템과 특수능력을 조합하고 이를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전략 구상을 매우 집중적으로 해야 하는 게임이기 때문에 다른 RTS 게임에서 느끼기 힘들었던 전략 설계의 intensiveness, 거기에 더하여 전략의 성공 여부를 매우 빠른 템포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LOL 커뮤니티에서는 '한타'라는 용어로 자기 편과 상대 편의 여러 영웅들이 함께 맞붙어 싸우는 상황을 표현하는데 이때 각 영웅별 특성을 잘 활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서로 견제하거나 도망가는 게 아니라면, 10여초 만에 한타의 승패가 판가름난다.) 이것 또한 빠른 피드백이라는 점에서 flow의 또 다른 조건의 하나다.

사람들이 중독성이 높은 게임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가만히 살펴보니까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구나 싶다. 대학원생인지라 게임할 시간이 그리 많은 건 아니지만, 이런 게임을 하면서 내부는 어떤 구조로 설계했을까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고(...아마 게임하면서 그런 거 생각하는 사람이 많진 않을 것 같지만 ㅋㅋ), 사람들에게 재미 요소를 주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혹은 느끼기 위해 다양한 게임을 접해보는 것 자체는 좋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전통적인 의미에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기도 하고.

얼마 전에 이 게임 개발사(Riot Studio)가 별도의 유통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한국 서비스를 하겠다고 발표했다는데, 그러면 지금의 불안정한 접속 환경이 많이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오랜만에 재밌게 할 만한 게임을 하나 찾았으니, 이것도 가늘고(?) 길게(?) 즐겨봐야지.


  1. 참고로 나는 내가 메인으로 재미붙여서 했던 게임들은 모두 정품 구입하였다. 스타크래프트 오리지날, 브루드워, 토탈, 슈프림커맨더 및 확장팩/후속작, 워크래프트2, 커맨드앤컨커과 타이베리안선 모두. 레드얼럿과 심시티는 복사 방지 기술이 별로 없었던지라 친척한테 빌려서 했던 걸로 기억한다; 생각 외로 나는 게임이나 소프트웨어에 돈을 좀 쓰는 편인데--이런저런 소소한 프로그램들도 크랙을 구할 수 있더라도 일부러 정품 구입한 게 꽤 있다--내가 소프트웨어로 밥벌어 먹고 살아야 할 입장이라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를 충분히 즐겁게 해준다면, 또 내 시간과 노력을 충분히 아껴준다면 그 자체로 가치를 지불하는 것이다. (다만 포토샵 같이 좀 너무 심하게 비싼 건...ㅠ_ㅠ 내가 필요한 기능만 선택해서 가격을 매길 순 없을런지... 나의 사용 패턴과 대체재의 존재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내 사용 가치에 비해 가격이 너무 높은 경우는 때로 어둠의 경로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어둠의 경로는 대체재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물론 그동안 그럴 수 있도록 경제적 여건이 허락해준 것도 있지만, 사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크게 어려운 건 아니기도 한듯. 

Posted
Filed under 컴퓨터
이 글은 텍스트큐브 구글맵 플러그인 개발 테스트를 위한 글입니다.
블라블라블라
Location
Posted
Filed under 살아가기, 생각하기

때로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낳기도 하지만, 결국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한 세계는 고독하다. 인류가 끊임없이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현대에 와서는 외계생명체를 찾으려 하고 우주로 탐사선을 보내는 것처럼, 세계는 다른 세계를 찾아 헤매인다. 그것은 어떤 한 세계가 어느 정도의 발전 단계에 다다르면 자연스레 일어나는 일이다.

다른 세계와의 만남은 흥미로운 일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두 세계가 만났을 때 서로가 온전하게 남은 채 융화될 수 있을까. 전쟁과 정복으로 점철된 인류 역사가 증명해주듯 한쪽 또는 양쪽을 파괴하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뎠을 때 발생한 전염병과 마찬가지로, 스티븐 호킹이 경고했던 생물학적 장벽과 같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분의 문제가 터질 수도 있다. 만남과 이별의 모든 과정에서, 두 세계가 의사소통하는 프로토콜이 다르다면 더욱 힘들고 어렵고, 의도와 다르게 두려움에서 기인한 폭력성을 띠기도 한다.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고 또 헤어졌을 때, 이미 그 세계는 그 이전의 세계가 아닌 것 같다. 그 흔적을 지우고 원래의 세계로 되돌아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아프고 고통스럽고, 그 세계는 이미 그 과정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이 과정을 처음 겪는 세계는 열병을 앓은 것처럼 흔적이 남는다. 하지만 거기에 참여했던 두 세계는 내연이 더 강해지고, 조금 더 아름답고 멋진 다른 세계들을 만났을 때 보다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과정 속에서 긍정적인 면을 본다.

단, 한쪽을 일방적으로 파괴하고 정복했다면 그 세계는 외연은 강해지겠지만 내연이 강해지지는 않는다. 상호 작용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뭇 종교들이 사랑을 강조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미시적 스케일에서 거시적 스케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계의 만남은 결국 그 근원이 사랑에 기초하고 있음이어서가 아닐까. 인간은 욕구의 동물이고, 그 욕구의 정점은 사랑과 맞닿아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쩌면 지적 사춘기는 끝났을지 몰라도, 인생의 유년기 다음에 한 인간으로서의 사춘기는 이제 겨우 시작일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세계다.

Posted
Filed under 살아가기, 생각하기

요즘 이런저런 일도 있었고, 오래 전부터 생각해오던 것을 드디어 실행에 옮겼다. 궁동 성당 청년성가대에 들어가기로 했다. 본문에서는 뒤에 나오지만, 혹시 제목에 나온 지적사춘기에 대한 시발점이 궁금하시다면 이 글을 먼저 보면 도움이 될 듯. (그러고보니 우연의 일치인지 정확히 만 3년 만에 쓰는 글이다. 허허.)

오늘 청년회식이라 하여 성당에서 청년미사 후에 단체로 성당 마당에서 야외 고기파티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물론 전에도 청년회식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보통 사나래 사람들은 따로 모여서 저녁을 먹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참석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봉사자들이 힘들게 준비한 식사에 사람들이 너무 없으면 좀 그럴 것 같기도 했고(사실 저녁을 먹었기 때문에 고기 자체가 땡겨서 간 건 아니었다), 성가대에 오랜만에 아는 형(실제론 같은 나이지만--빠른 87--어쩌다 이렇게 굳어졌다. 학부 입학 전 꽃동네에서 함께 봉사활동하다 알게 된 나름 오랜 인연이 있다)도 나왔길래 인사도 좀 하고 사나래 사람들하고 이야기도 좀 할까 해서 겸사겸사 들렀다.

그러다가 성당에서 이런저런 활동하는 사람들이 마니또가 되어 성당에는 오지만 활동이 없는 사람들을 보살펴주기 위해 공개추첨 형식으로 마니또를 뽑았는데 내가 뽑은 종이에 적혀있던 사람은 전자과 선배였다. (의외로 궁동 성당엔 학부생 이상으로 대학원생의 활동이 많다.) 이분으로부터 성당 봉사활동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마음이 갑자기 동하여 성가대에 들게 된 것이다.

내가 궁동 성당에 다닌 건 학부 1학년 때부터니까 벌써 6년째다. 중간에 교환학생과 휴학으로 없었던 기간 빼고 봐도 5년을 꽉 채우고 있으니 나름 정도 많이 든 성당이다. (교적이 있는 동네 성당보다 여기가 더 정들었다고 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활동하진 않았지만 가톨릭 학생회인 사나래에 나름 발도 걸치고(?) 있다. 카이스트에 6년이나 있었으니 이미 성당에서도 웬만큼 아는 선후배들이 많이 있고, 그중에 또 상당수가 성당에서 전례부, 복사, 성가대, 성소모임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이전에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발을 담글(?)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하지 않았던 이유는, 우선 학부 때는 집에 자주 갔었고 가족들과 미사를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아 동네 성당이든 궁동 성당이든 한쪽에 고정적으로 활동하기가 모호했다는 점이 가장 컸고, 또 나름의 지적사춘기를 겪으면서 신앙에 대한 회의를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사는 거의 빠지지 않고 다녔지만, 그것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의 위안을 위한 면이 더 많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내 마니또 분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최종적으로 '과학만으로 모든 걸 설명하려 들 필요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됨에 따라--또한 주변 사람들의 많은 기도 덕분이기도 하지만--20대 초반, 학부 재학 기간을 통해, 삶에서 궁극적으로는 논리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라도(혹은 그 여부를 알 수 없어도)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고민하기보다는 때로는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느끼는 것이 나의 정신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러한 지적사춘기의 결과로 내 자신이 스스로 혼자서 존재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나의 한계를 받아들인 것이 이렇게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한 결정에 큰 동기가 되었다. 내 스스로 인간임과 함께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였기 때문에, 초월적 존재를 나의 가치 체계와 사고 체계 안에서 그 필요성과 필연성을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이고, 여기에 예수님이라는, 사랑하고 회의하는 인간을 통해 집대성된 기독교 교리가 나의 가족문화적 배경1에 자리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가톨릭 신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제는 개인적 신앙뿐만 아니라 단체와 봉사활동을 통한 신앙도 경험하고 싶은 것이다.

한편으로는, 전산학도이자 대학원생으로서 전문 분야에서 항상 비판적 사고를 견지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서도, 그것이 내 삶의 전부가 될 이유도 없고 그렇게 되었을 때 나타날 정신의 황폐화를 마주하고 싶지 않다. 더군다나 신앙생활에서 말이다. 게다가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게 된 이후 연애라는, 현실에서의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또다른 의미로 느끼게 되었고, 그냥 미사 열심히 나가는 것에서 뭔가 다른 차원의 관계 형성을 해보고 싶어졌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방식의 신앙생활을 그냥 무조건 받아들이는 식으로 하는 것도 곤란하다는 점 또한 이해하고 있다. 결국 교회도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기 때문에 다같이 하느님을 향하고 있다는 큰 지향점은 같아도 결국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똑같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이고, 인간적으로 힘들고 스트레스 받는 일들도 존재할 것이다. 하느님의 교리 그 자체가 무결하여도 우리가 보는 것은 사람을 통해 구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것을 보고 그것을 나의 진리로 받아들이고자 할 때는 항상 신중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이 부분은 성서 공부를 좀 해야 할 듯. 다행히 어머니가 성서 교육 봉사활동을 오랫동안 해오고 계시기 때문에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다만, 조금 번외의 이야기로, 사회적 이슈에 대해 가톨릭 교회가 공식적으로 취하는 입장을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고민을 좀더 해봐야 할 것 같다.

추상적인 이야기에서 좀 현실적인 이야기로 내려와서, 실질적으로 성가대 활동을 하고자 한 이유 중에 하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보고 싶기 때문인 것도 있다. 물론 카이스트 사람들이 꽤 많기는 하지만 여전히 전혀 다른 학교·전공의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을 신앙과 봉사활동이라는 틀에서 만나면 어떨지 궁금하다. 또 다른 이유로는 미사할 때 내가 가장 좋아하고 은혜받는다고 느끼는 시간이 성가 부르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피아노를 치기 때문에 반주를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노래 그 자체도 피아노 연주만큼이나 내게 충분한 감흥을 주는 활동이다. 특히 중고등학교 시절엔 변성기가 너무 심하게 와서 노래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 노래가 나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대학에 들어온 이후 1학년 때 실내악 앙상블 수업에서 아카펠라 공연에 성공적으로 참여하면서 내가 노래를 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긴 것도 한몫 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나는 대중가요를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거의 안 들어서 아는 노래가 워낙 없기 때문에 노래방 가는 건 딱 질색이다. ㅋㅋ)

뭔가 성가대 한번 들어가려고 글 참 거창하게 쓴다 싶기도 한데, 단순히 성가대에 들어가는 이유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내 삶의 단계에서 중요한 전환점 중에 하나라고 생각되기에 함께 정리하는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궁동 성당이라는 축복 받은 환경과 신앙 속에서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지적사춘기를 끝내고--그렇다고 이것이 회의의 끝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이행해야겠다.


  1. 한때는 이러한 가족문화적 배경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결론내려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 과정을 위해 소모해야 할 에너지를 생각하니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으로써 더 높은 차원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라는 사람이 뭐랄까, 자아가 더 강하고 완고한 사람이었다면 아마 이를 감수하고서라도 회의의 끝까지 달렸을지도 모르겠다. 맘먹고 하자면 할 것 같은데, 굳이 그러고 싶지 않은 건 천성 탓일까. 

Posted
Filed under 살아가기, 생각하기

젊은층 투표율이 올라가고 인터넷 여론이 실제 여론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번 선거는 기존 선거와 확실히 달랐다. 지역색이 엷어지고 세대와 계층간 투표 성향이 뚜렷하게 갈리는 모습이 나타났다. 특히 서울은 강남구·서초구·송파구·강동구의 지지 성향이 이 정도로 분명하게 다르다니 정말 놀랬다.

내가 참여해본 선거로는 이번이 두번째다. 첫번째는 현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제17대 대통령선거였고, 이듬해 있었던 제18대 국회의원 총선의 경우 스웨덴에 교환학생 가있던 관계로 투표할 수 없었다. 여러 의미로 이번 선거는 내겐 특히나 소중한 투표권 행사였다. 부재자투표를 신청했다가 서울에서 하는 워크샵 때문에 못하고 당일날 투표하기 위해 집에 갔는데, 기차 날짜를 잘못 예약하질 않나 투표소에서 봉함용봉투와 투표용지 말고 겉봉투도 가져와야 한대서 선관위에 전화해 확인하는 등 온갖 역경(...)을 헤치고서야 투표할 수 있었던 것이다. ㅋㅋ

내 개인적으로는 각 정당에 대해 다음과 같은 느낌을 가지고 선거에 참여했다. 한나라당이 여당으로서 비교적 많은 인재들을 가지고 행정력이나 일 추진력은 좋은 것 같지만, 경제성장을 외치며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실상은 그네들만의 특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경향을 많이 보이고 있고, 민주당은 일단은 진보라고 쳐주고 있긴 하지만 제대로 된 의미의 진보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뛰어난 인재들이 포진해있는 것 같지도 않은 모호한 상태이고,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들의 문제와 입장 대변에 너무 집중하여 다른 큰 문제들을 잘 못 보는 것 같고, 국민참여당은 일단 '노무현 정신 계승'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있지만 구체적인 정책은 잘 모르겠고, 진보신당은 젊은층들에게 맞는 이미지를 주고 있는 것 같지만 아직 잘은 모르겠는... 그런 상태였다. 다만 유시민 경기도지사 후보에 대해 극과 극의 의견이 갈리는 것을 주변에서 볼 수 있었는데, 유시민을 인정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당대의 지식인으로 인정하며 아주 좋아하는 반면 그의 날카로운 인상이나 과거 행적을 두고 박쥐처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한다면서 싫어하는 사람은 또 아주 싫어했다.

구체적으로 내가 누구를 찍었는지 밝히진 않겠지만, 나는 특정 당을 무조건 찍은 게 아니라 일부러 좀 섞어서 찍었다. 여당이 독주해도, 야권이 독주해도 둘 다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신기하게도 선거 결과는 이러한 내 투표 경향과 거의 일치하게 나왔다. 여당에 대한 전통적인 지지표와 부동층으로 끝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사람들의 견제표가 함께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물론, 여당과 야당이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의회를 각각 장악함으로써 생기는 불협화음과 마찰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당이든 야당이든 한쪽에서 다 가져가버리면 비리와 부패가 심해지고--그 본보기로 서울시의회는 정말 절망적이었다--적절한 견제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다소의 효율성을 희생하더라도 나는 이런 체제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정치권에서도 앞으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일 추진이나, 전임자가 진행하던 정책들을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폐기하는 행정을 피하고, 정말 서로에게 대한 건설적인 토론으로 일을 하면 좋겠다. (다만 아쉬운 건, 현재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제도적 틀 안에서 토론을 통해 무언가를 성취하는 게 아니라 투쟁해야만 했던 시대를 겪다보니 그러한 토론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것 같다는 점이다.)

이미 언론들도 다루긴 했지만 이번 선거에서 아쉬운 점도 많았다. 교육의원 선거는 사전 정보가 별로 없었던 데다 추첨으로 결정된 투표용지 표기 순서에 따라 당선될만큼 선거의 의미가 별로 없었다고 생각된다. 다행인 건 이 부분은 이미 올초에 문제점을 인지하고 법령이 수정되었기 때문에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것. (이럴 때 보면 국회의원들도 뭔가 하는구나 싶다. ㅋㅋ) 선관위에서 인터넷과 여러 매체를 통해 투표 방식에 대해 홍보하려고 노력한 점이 눈에 띄었지만 최대한 많은 유권자들이 올바로 투표해야 의미가 있는 민주선거 방식을 생각했을 때 역시 1인8표제는 좀 무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퇴 후보에 대한 투표용지 변경 이슈의 경우 공직선거법에 그대로 둔다고 명시되어 있으니 법을 고치지 않는 한 이의 제기는 어려울 것 같고 다만 충분한 사전 공지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반성은 이뤄져야 할 것 같다.

한편으론 나름 투표 새내기(...)로서 불만인 점도 있었다. 6자리 x n명에 달하는 많은 후보들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얻는 것이 힘들었다는 것. 선관위 홈페이지에 개제된 정보는 재산신고액, 병역이나 전과 기록 말고는 알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고, 선거공보물은 전교조나 4대강과 같은 초쟁점 현안만 아니라면 어차피 다 좋은 소리만 써놔서 큰 변별력이 없었다. 무상급식조차 단계적/부분적이냐 전면실시냐 정도의 차이였으니.

선거운동 방식 또한 변화가 필요하다. 내가 겪은 건 전체의 아주 일부에 불과하긴 하지만, 학교 근처 식당에 갔는데 (내 투표지역과 상관 없는 건 제쳐두고라도) 선거운동원들이 돌아다니며 '잘 부탁드립니다'라며 명함 나눠주는 방식은 맘에 안 들었다. 확성기 켜놓고 돌아다니면서 홍보하는 것도 그 사람이 후보로 나왔구나 하는 정도 말고는 오히려 소음 피해만 생기는 느낌이다. 물론 실제로 유권자들을 만나기 위해 사람 많은 곳들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유세하는 것 자체는 필요하겠지만. (한 가지, 당연히 이런 이야기는 유권자들이 선거에 기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 기반한다.)

내가 알고 싶은 건 후보 별 정책과 공약, 그것의 실현 의지와 뒷받침할 능력, 그리고 신뢰성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정보를 얻고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공약은 공보물에 써있다쳐도, 같은 공약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사람 됨됨이를 봐야 하는데 선거운동기간 동안 이걸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나마 좀 요령이나 정치적 배경지식이 있는--주로 20대 후반 ~ 30대 유권자들?--사람들은 인터넷으로 후보자들의 과거 행적을 다 뒤져보기도 한다는데 정말 시간내서 하지 않으면 이것도 쉽지 않다.

어렸을 때 봤던 것처럼 학교 운동장 등에서 주말에 사람들 운집시켜놓고 공약 발표회 같은 걸 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후보가 실제로 말하는 어조와 태도부터 시작해서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기회로는 꽤나 좋은 방법인 것 같은데 왜 없어졌는지 모르겠다. 아마 TV토론회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한 접근성은 좀더 좋아져야 할 것이다. 이번엔 NHN에서 선관위와 함께 사이트를 만들어 영상을 제공하였는데 Mac에서는 사실상 재생이 불가능했고, 저작권 문제 때문인지 방송사 홈페이지에 로그인해야 볼 수 있는 경우도 있는 등 TV를 보지 않는 사람에겐 상당히 불편했다. 선거공보물에 후보자별로 공약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표로 정리하고, TV토론회의 접근성을 높이거나 공약발표회를 가지면 지금보다는 정보 접근성이 훨씬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뭐, 궁국적으로는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리고 관련 시민단체 같은 것들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공약 이행 여부를 임기 내내 지속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체제가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공개적으로 평가되고 이를 통해 정치가들이 공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면 좋겠다. 이번 선거 결과가 여당과 야당의 상호 견제로 나타난 만큼, 제1야당인 민주당이 자만하지 않고 국민들이 부여해준 권리를 바탕으로 본연의 감시 기능을 잘 수행하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들 또한 국민들이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가장 근본 원인인 소통의 부재1를 재연하지 않기를 바랄 뿐.

선거를 지켜보면서--좀 뜬금없는 이야기인데--이명박 요정설2이 정말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분과 이야기를 하다가 세종시 원안/수정안에 대한 의견을 물었더니 그 안들 자체는 각기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현재의 수정안은 그걸 추진하는 사람들을 (몇몇 직접 관련 경험에 의해) 도저히 잘할 것이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수정안에 반대한다고 하였고, 나는 이를 통해 일의 내용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보는 것이 어쩌면 정치에서는 더 중요하겠구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게는 정치적 관념에 대한 큰 수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잘 맞아떨어져 운이 좋은 경우겠지만) 내가 투표한 것이 선거 결과에 나타나는 것도 신기했고, 젊은층이나 네티즌들이 말로만 정치 욕하지 않고 실제 투표로서 실제 세상이 돌아가는 데 영향을 끼치게 됨과 함께 선거 결과를 통해 앞으로도 그러해야겠다는 의지를 이들에게 심어주게 된 것 같아 꽤나 만족스러운 선거라 생각한다.

다음부터는 민주주의의 참뜻을 실현할 수 있도록, 국민 개개인이 후보들에 대한 좀더 상세한 정보를 바탕으로 공약과 신뢰성에 기반하여 소신 투표를 하는 방향으로 한걸음 더 나아갔으면 좋겠다.


  1. 소통이라는 게 국민들의 모든 의견을 일일이 다 반영하라는 그런 것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의견을 들어서 그것을 소중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거기에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IT기술과 소셜네트워킹의 흐름에 발맞추어 사이버 공간의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고 유언비어가 국가의 통제가 아닌 커뮤니티 스스로의 자정 작용에 의해 걸러질 수 있는 바탕을 만든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2. 정확한 시발점은 모르겠지만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풍자 만화 같은 것이 하나 있다. 촛불집회를 하는 사람들에게 이명박이 요정처럼 뾰로롱 나타나 사실 자기는 국민들에게 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 위해 온 거라고 말하고 뾰로롱 사라지는 내용이다. (말로만 쓰니까 썰렁한데 실제로 보면 좀 웃기다.) 

Posted
Filed under 컴퓨터

구글이 텍스트큐브닷컴과 TNC를 인수했을 때만 해도, 나를 비롯해 TNF/Needlworks의 손길이 닿은 텍스트큐브가 구글 스케일로 아시아 시장을 타겟으로 하는 블로그 제작 도구로 보다 많은 사용자들에게 다시 재평가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어떤 기대가 컸었다. 초기에는 구글에서도 상당히 열정적으로 운영해서, 다른 구글 서비스들이 가지는 치명적 단점을 극복하고 고객 서비스도 비교적 잘 했었다.

하지만 구글은 매우 실망스러운 공지글과 함께 텍스트큐브닷컴을 블로거닷컴으로 통합한다고 한다.

블로거닷컴은 블로그 시장 아주 초창기부터 있었던 서비스로 이 또한 구글이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 서비스이다. 북미나 유럽 등지에서는 제법 사용되는 편이지만, 트랙백이나 카테고리 등이 편리하게 지원되지 않고 댓글 UI의 불편함이나 스킨 자유도가 떨어지는 등의 문제점을 비롯하여 단순히 기능적 번역만 되어 있을 뿐 서비스 운영 주체가 구글 본사기 때문에 한국어 같은 비유럽 언어권 고객 지원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은 블로거닷컴이 한국 및 아시아 시장에서 지지리도 인기 없던 이유이다.

설치형 텍스트큐브의 경우 아무래도 소수 개발자들의 취향을 따라가는 면이 많다보니 UI나 사용자 경험 측면에서 그닥 좋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태터툴즈에서 출발해 다음으로 넘어간 가입형 블로그인 티스토리나 구글이 인수한 가입형 서비스인 텍스트큐브닷컴은 이를 아주 잘 정제하여 사용자들에게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었던 서비스들이다.

어쨌든 텍스트큐브닷컴이나 블로거닷컴 모두 구글이 운영하는 서비스들이고, 기업으로서 불필요한 비용 투자를 최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 인수 때부터 구글이 사실상 중복되는 서비스인 이 둘을 그냥 공존하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존재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텍스트큐브닷컴에서는 사용자들에게 구글이 텍스트큐브닷컴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음을 강조해왔고 한동안은 서비스 업데이트도 충실히 진행하여 어느 정도 불안감을 잠재워놓았다. 이후 업데이트가 좀 뜸해졌으나 내가 전해듣기로는 구글에 인수된 서비스들이 모두 거쳐야 하는 악명높은(?) 플랫폼 통합 작업 중이라는 얘기를 들은 게 마지막이었다.

이익을 좇아야 할 의무가 있는 기업이고, 어쨌든 운영 권한은 구글이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그러한 통합 결정 자체를 내가 어떻게 반대할 수는 없다. (심적으로 반대하더라도 법적으로 어찌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대책 없이 나중에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식의 불친절하고 일방적인 통보식 공지, 개발 인력 일부가 이미 블로거닷컴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밝힘으로써 얻은 사용자들의 배신감, 악명 높은 구글의 고객 지원이 모두 합쳐져 구글코리아의 브랜드 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구글코리아의 가장 좋은 서비스로 평가받고 있었는데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내 손길이 닿기도 했던 소프트웨어일뿐만 아니라 그 이름과 상표의 제작 과정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텍스트큐브닷컴을 통해 우리가 추구하고자 했던 블로그 도구의 어떤 한 이상향이 구글을 통해 언어의 장벽을 넘고 세계 시장에서 워드프레스, 무버블타입, 텍스타일, 블로거닷컴 등과 제대로 된 진검승부를 벌이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자본의 논리로 인해 그렇지 못함이 슬프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특히나 블로거닷컴은 기술적으로나1 사용 편의성 측면에서 텍스트큐브닷컴에 비해 매우 뒤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블로거닷컴과 통합하게 될 경우 텍스트큐브가 메인이 되었으면 했지만 규모의 논리에 의해 그 반대가 된 것이 아쉽다.

오픈소스 설치형 블로그로는 세계 최고의 툴이 된 워드프레스도 태터툴즈가 시작할 당시를 생각해보면 기술적으로나 UI 면에서 대동소이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영어권이라는 막대한 시장과 언어의 이점을 안고 가면서 급속도로 성장했고, 풍부한 개발자 pool과 이미 잘 정착된 오픈소스 문화 덕분에 태터툴즈의 후신 텍스트큐브는 한국과 아시아 일부에서만 알려진 도구로 남은 사이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이다. 이는 실로 언어의 장벽이 문제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을 타개해줄 그나마의 희망이 구글이었는데...

설치형 텍스트큐브 개발팀의 경우도 지속적인 유지가 가능할지는 사실 불투명하다. 기존 멤버가 주로 계속 진행하고 있을 뿐 새로운 신규 개발자 유입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본업 따로 있는 개발자들이 사용자 지원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개발이 빠르게 진행될 수 없다. 이는 우리나라의 웹개발자 숫자가 아직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시장 규모도 작아서 그런 것이라 생각되는데, 그냥 하던 멤버들이 계속 할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 10년 20년을 내다보면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 텍스트큐브라는 브랜드는 설치형 텍스트큐브만 가지게 되었으므로 그런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이 이름에 대한 이미지를 쇄신하고 원래 목표했던 바를 이루어가는 것은 우리 TNF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1. 이미 구글플랫폼 위에서 돌아가도록 모두 수정된지 오래일 테므로 대용량 서비스 측면에서는 기술적으로 더 우수할 수 있겠지만 프론트엔드 부분은 (텍스트큐브닷컴 개발자들이 참여했다는 템플릿디자이너 빼면) 확실히 텍스트큐브닷컴이 낫다. 

Posted
Filed under 살아가기, 생각하기

얼마 전,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김용철 전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는 책을 읽었다. 책 내용에 대해선 이미 인터넷에 많은 글들이 올라와 있으니 생략. 다만 글이 너무 세세한 사례 위주로 흐르다보니 중간 이후부터는 다소 지루한 면이 있었다.

책을 보면서 든 생각은, 왜 그래야만 했느냐 하는 것이다. 뇌물 없이는 기업 활동이 불가능했던 것일까? 이건희 일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일까? 삼성전자의 신화는 단지 시대적 상황에 잘 맞아떨어진 우연이었던 것일까? 그렇게 많은 재물을 끌어모으고 자기 맘대로 회사를 휘두르는 이건희 일가의 사람들은 과연 행복할까? 삼성 같이 큰 기업일수록 더 많은 책임의식을 느끼고 더욱더 투명하게 경영하려고 해야 하는데, 그 정반대로 흐르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난 그저 이건희 일가와 그 가신들에게 정말 그래서 행복하느냐고 물어보고 싶다. 그들의 행복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기업을 잘 경영하고 있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에서 나와야 할 텐데, 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암담하다.

나는 삼성의 비리와 뇌물 문제에도 염증을 느꼈지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 어쨌든 지금의 삼성을 만든 사람들이 누구인가, 그리고 앞으로의 삼성을 만들 사람들은 누구일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말하듯 안타깝게도 지금의 삼성을 만든 사람들은 이익과 보상에서 많은 부분 제외되어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고 앞으로는 그럴 수 없을 것이며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배들이 삼성에 가지 말라고 하면서 '피만 쪽쪽 빨린다'는 표현을 했는데, 소프트웨어 문화에서는 사람이 재산이기에 이런 인식이 퍼져서는 절대 우수한 인재가 삼성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이건희가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하였다. 세계 전자시장의 트렌드가 하드웨어 중심에서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며 10년 후 삼성을 먹여살릴 것이 없다는 말과 함께 소프트웨어 투자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물론 2008년 퇴진 당시 이야기했던 공공 이익 실현 어쩌구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우리학교에 삼성전자에서 일하시다 이번에 석사 동기로 들어오신 분이 있다. 회사에서 확실히 소프트웨어를 강조하는 분위기이긴 한데, 문제는 그걸 제대로 할 사람이 없다고 한다. 대충 외부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듯 삼성전자의 핵심 임원들은 대부분 하드웨어 공부를 했던 사람들이다. 실제 물건이 만들어져야만 가치가 인정되는 세계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이디어나 사람 자체가 가치가 되는 소프트웨어에 대한 가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같은 회사 내에서도 실적을 쌓기 위해 부서끼리 아이디어나 지식을 훔치는 사례가 존재한다고 한다. 윗선에서 이걸 제대로 판단·컨트롤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삼성이 바뀌면 우리나라가 바뀌는 건 시간 문제라는 것이다. (이건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다) 워낙 사회 전반에 많은 영향력을 가진 회사기 때문에, 삼성이 제대로 하면 대한민국이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삼성전자에 근무하셨던 분으로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신 것이기도 하겠으나, 내가 봐도 삼성이 제대로 하면 다른 기업들도 그러한 문화와 관행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니 삼성에게 사회적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분이 나와 친구들에게 해주셨던 이야기는, 제대로 일하는 외국계 기업에 가서 엔지니어로서뿐만 아니라 매니저나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한 총괄 담당 정도까지 올라서고 그런 사람들이 다시 국내 기업에 들어와 소프트웨어 중심의 문화를 아주 장기적으로(몇십년?) 조금씩 조금씩 바꿔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경영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의 경우도 요즘 나에게 경영 공부를 특히 강조하신다. 아버지는 회사에 말단 사원으로 입사해서 온갖 실무 경험을 쌓으신 후 사장의 자리에 오르셨다. 수십억 수백억짜리 프로젝트가 아버지의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수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회사의 오너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월급만 받을 뿐이다. 적어도 아직까진 아버지가 얼마나 더 잘 하느냐에 따른 추가적인 보상은 승진 외에 거의 없었다. 그래서 직접 오너십을 가질 기회가 있다면 그렇게 하라는 이야기도 하셨었고, 오너십까진 아니더라도 단순히 엔지니어로서만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경영을 통해 한 사람이 할 수 없는 큰 규모의 일을 진행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경영이라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에 대한 것들이라면서.

전문적인 기술로 먹고 사는 건 요즘같이 빨리 변하는 세상에선 잘 해봐야 10~20년이다. 그렇다면 그때그때 필요한 기술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원하는 가치와 이상을 향해 갈 수 있도록 조율하는 능력, 곧 경영 능력이 중요하다. 헌데 경영만 알아가지고는 이렇게 전문화된 세상에서 각 전문가 집단을 설득하고 스스로 만족하며 움직이게 만들 수 없다. 지역적 문화 특성, 전문가 집단 고유의 문화 특성을 알아야 하고 전문지식도 알아야 한다.

소프트웨어가 참 어려운 것이, 전산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거나 흥미 있는 일에 있어서는 그 어떤 보상도 필요 없을 만큼 열정을 쏟는다. (오픈소스가 어떻게 이만큼 발전했겠는가!) 하지만 많은 경우 같은 전산 분야 내에서도 입에 풀칠하기 위해 하는 일과 자기가 재미를 느끼는 일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의 경영진은 이런 사람들이 가진 문화와 코드(소스코드 말고 '코드가 맞는다'할 때 그것)를 이해할 수 있어야 효과적으로 이 사람들의 퍼포먼스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삼성전자에서 오신 동기 분이 이야기하신 경영하고는 조금 다른 출발점에서 이야기한 것이긴 하지만, 결국 삼성전자는 아직 이러한 소프트웨어 경영 리더십이 없다는 위기의식에서 소프트웨어와 경영 양쪽을 모두 겸비한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아버지는 분야는 다르지만--사실 소프트웨어 공학의 많은 메타포가 건축에서 온 것이긴 하다--경영을 함께 알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가끔은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그냥 외국으로 확 떠버릴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태어나 살아온 땅이고, 기왕이면 같은 성공을 하더라도 주변의 한국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 미래에 대한 많은 질문을 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Posted
Filed under 살아가기, 생각하기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사회운동가로서 인간 예수가 당대의(그리고 현재의) 정치적·경제적(자본주의) 틀과 다른, 모든 인간이 기본적인 품위를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을 지향하고 그것이 영광의 길이 아니라 수난의 길이었음을 보여주는 책. 열두 제자들이 기대한 것과 예수님의 지향점 차이로 인한 갈등을 사회개혁(변혁?)운동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하지만 너무나 강하고 확실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때문에, 이 책을 쓴 김규항씨 본인조차 그러한 삶을 살 것인가, 살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부활의 과학적 신빙성이 예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예수가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사회에 잘 '적응'한 인텔리나 중산층들이 어떻게 보면 지배체제의 독식을 더욱 공고히 하는 (스스로 원하든 원치 않든) 보수성을 띰을 나타낸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두가 '잘' 사는 이상향을 좇기보다 자신과 가족의 안위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음'을 주장하는데 김듀항은 그것에서 벗어나야 예수님이 전파한 가치를 따라 살게 됨을 역설한다.)

메마르고 품위 없이 사는 사람들을 사회에서는 교양없는 사람들로 간주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실은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악다구니를 쓰지 않아도 되고 폭력의 현장에서 한발치 떨어져있을 수 있기에 그리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이 예수가 지적한 위선이자 그가 로마와만 대립한 것이 아니라 유대민족의 바리사이들이나 기득권층과도 대립했던 이유라는 것이다.

나 자신 또한 한국에서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나의 순수함과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들을 큰 어려움 없이 추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내가 만약 그럴 수 없는 환경에서 태어났다면—그것이 신의 뜻이라 해도—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든다. 또한 고등교육을 받고 유대감 넘치는 집에서 행복하게 살아온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가치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의무감도 들었다.

처음엔 김규항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책만 재밌게 봤는데, 중간쯤 읽다가 저자 프로필을 보니 전형적인 좌파적 성향을 가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와 같은 사회운동을 해야 한다고 보다 강하게 주장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문제는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그 사람 본인이 그런가 하는 점.) 흔히들 그런 사람들을 두고 반골의 성향이 있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무엇이 옳고 옳지 않은가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여태껏 인류가 겪어왔던 모든 사회 체제는 부조리한 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어쨌든 이 책을 보면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를 바라보면 예수가 당시 기존의 정치적·경제적 개념과 사회적 관습과는 완전히 다른 파격을 추구했음을, 예수가 지배체제로부터 사형 당한 이유를 보다 투명하게 바라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비록 그가 자신이 주장하는(?) 삶대로 살고 있지는 못할지도 모르지만 자기라도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글을 쓴 것이 아닌가 싶었다.

엊그제 룸메이트가 소개해준 일본 SF애니메이션 '프리덤'을 보았다. 지구가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인류는 달에 인공도시를 짓고 거주하게 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지구가 푸르게 회복되고 살아남은 인류가 있음에도 도시의 운영자들은 시민들에게 그 사실을 숨기고 진실을 알려는 자들을 죽이거나 가둔다. 여기서 그 운영자들은 달에 도시를 만들 정도의 과학기술로 인해 지구를 잃어버릴 뻔했던 만큼, 시민들(인간들)이 다시 과학기술의 힘이 주어져도 평화롭게 살 것이라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노라 주장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일견 그들의 주장이 이해되고 거기에 반기를 드는 젊은 주인공들이 '너무 어려서' 인간에 대한 지나칠지도 모르는 희망을 갖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지구와 다시 왕래가 이루어졌을 때, 달의 도시가 더 이상 그곳의 인류에게 전부가 아니게 되었을 때 잃어버릴 수 있는 기득권 때문에 지배체제로서의 저항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그 애니에서는 그런 논리를 일부러 숨겨서 진부한 논리적 흐름을 탈피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학부식당에 있는 카페베네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좀전에 근처 자리에 앉았던 어떤 여학생 둘의 대화가 생각난다. 한 명이 부모님과 전화하면서 마구 투정을 부리니까 다른 학생이 왜 그런지 물어보았다. 아버지 직장 이동 때문에 5명이 사는 90평짜리 집이 55평짜리 집으로 이사가게 되었는데 방이 너무 작아져서 싫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제시한 대안은 집 2개를 사서 터서 쓰자는 것인듯 했는데 그래봤자 방 크기는 똑같지 않냐는 것. 물어본 친구는 벙 쪄서 4인가족 기준이면 28평에서도 사는데 뭐 그걸 가지고 불평하냐는 볼멘소리를 했다.

이렇게 우리가 사는 삶의 경제적 수준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친구들 중에 돈이 많은 사람도 있고 별로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단순히 돈이 많고 적음은 문제가 아닌데, 그로 인해 인간의 가치 평가도 함께 변한다는 것이 문제다. 예수가 부자더러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 것은 그런 뜻에서일 것이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과 별개로, 이 책을 통해 예수님이 단순히 사랑의 교리만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인류가 대대손손 사회구조에 대해 왜, 어떻게 고민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잃어버리기 힘들 정도의 강력한 방식으로 남겼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쩌면, 내가 한때 무신론을 지지했을 때 바라보고 싶었던 예수의 모습이 이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어쨌든 그가 남겨준 정신적 유산은 실로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다.

Posted
Filed under 살아가기, 생각하기

블로그에 쓰기엔 조금 짧고, 트위터에 남기긴 길고, 구글버즈에만 남겨두자니 너무 전달범위가 좁고. 그래서 블로그에 쓴다.

NHN/KLDP 권순선님과 SPARCS 동아리 지원 관련해서 이런저런 얘기하다 술(...) 마시고 왔다. 다른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다른 관점과 목적으로 한 얘기지만 결국 1337 파티에서 노정석님이 해주신 것과 비슷한 이야기. 대충 그맘때쯤의 세대가 우리 세대에게 불만이나 아쉬움을 느끼는 것일지도.

"실패할 것이나 기술적인 한계를 놓고 재지 말라. (특히 학생일 때) 실수하고 실패해볼 수 있는 것은 엄청난 기회이자 권한이다.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뭐가 되든 끝까지 삽질해봐라."

동시에 카이스트가 등록금 정책 등으로 학생들에게 점점 학업 부담을 지우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셨다. 이른바 자기 좋아하는 일에 미친 '또라이'들이 많이 나와야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고...

Posted
Filed under 살아가기, 생각하기

우리가 의사소통을 하고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표현 수단을 사용한다. 목소리냐 문자냐 하는 것도 있겠지만,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느냐, 말투나 어감, 맥락적 의미 등 많은 것이 하나의 표현 안에 녹아들어가게 된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세련됨의 차이, 스스로의 인식 수준에 대한 차이는 있을지라도 누구나 당연히 가지고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표현의 의도와 본질이 표현 방식에 의해 왜곡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컴퓨터끼리 정보를 주고받는 인터넷 기반 기술을 구현할 때도 마찬가지지만 정보(의도)의 전달 여부는 항상 상대방이 그렇게 받아들였는지의 여부로 결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뭔가 상대방보다 내가 낫다는 걸 은연 중에 보이고 싶은 의도가 첨가된다든지, 컴플렉스를 상대방이 건드린 것에 대한 내재된 화의 분출이라든지, 상대방의 생각이 옳다는 건 알지만 질투가 난다든지 하는 다양한 심리가 겹쳐지면 이것이 표현을 왜곡시켜버리고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문제는 이러한 왜곡 현상이 표현하는 사람, 받아들이는 사람 모두 직접 인지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것을 의식적으로 잘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결과는 서로에게 남는 상처와 울분이며, 이것은 또다른 내재된 화의 원인이 된다.

대화는 상호소통, 상호교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의 생각과 의도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대화이지만, 그것이 상대방과의 지위 고하와 상관 없이 사람이기 때문에 느끼는 가장 근원적인 감정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옛날 사회에서는 그것이 권력으로 누를 수 있었기에 허용되었을지 몰라도, 경쟁이 심화되고 투명성이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설득의 방식이 설득 내용보다 더 중요해졌다. 최고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리더를 인정하고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어쩌면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구조인 것이다.

표현이 왜곡될 때 나타나는 예로 자신만큼 상대방이 노력한 부분이나 역할에 대한 무시,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기 등이 있다. 이런 것들은 아마 자기도 말해놓고 차마 체면 때문에 바로 거두지는 못하지만 뒤에서는 후회할 수 있는 독설을 내뱉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보스턴 필하모닉 지휘자 벤자민 젠더가 한 말 중에(TED 강연 동영상 참고) "단원들의 눈이 반짝거리지 않으면 그것은 (리더인)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직업적인 전문성으로 냉정한 판단을 하고 구성원들이 이것에 따르게 하는 것은 좋지만, 동시에 그것을 이유로 사람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하면 안 된다. 똑같은 목적을 달성하더라도 사람이기 때문에 어떻게 설득당했느냐에 따라 리더에 대한 평가와 감정은 완전히 반대가 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마지못해라도, 어쩔 수 없이라도 명백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건 인정받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때에 따라서는 나의 의견을 관철해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도 논리나 권위로 무장하여 상대방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기보다는, 소위 핑계를 댈 수 있는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줘가면서 대화를 이끌어나가면 상대방이 보다 기분 좋게 동의하게 만들 수 있다.

나의 의도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감정을 잘 표현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을 겪어봐야 하고, 그 와중에 오해도 받아보고 실수도 해보고 하면서 배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요즘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면서 주로 IT 분야에서 감정이 별로 섞이지 않은 건조한 의사소통을 주로 해왔던 것 때문에 많은 부분을 배우고 또한 고생하고 있기도 하다. 다행히도 내 여자친구와 나는 서로 그러한 면을 이해하고 그때그때 맘에 안 들었던 부분을 해소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표현 방식의 차이에 의한 마찰보다는 그러한 차이를 배움으로써 얻는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여기에는 심리적 거리낌을 극복하는 상당한 연습이 필요하다.

특히 요즘 많이 느낀다. 우리는 논리적 인간이 아니라 감정적 인간이다. 처세술, 설득하기 등의 내용을 담은 많은 책들이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알 것 같다. 감정을 잘 표현하는 방법을 연습하는 것은 명확한 논리로 설득하는 것보다 한발 앞서 해야 하는 일이다.

Posted
Filed under 살아가기, 생각하기

가끔 살다보면 무언가 내재된 화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대방이 자기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 개선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순간적으로 폭발하여 차마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 말이다.

특히 이런 것은 어떤 직업적인 인간 관계보다는 가족 관계에서 나타나기 쉬운데, 이것은 상대방을 서로 알아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깊고 미묘한 의사소통과 감정 교류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혹은 그것이 이미 너무 오래 전의 일이기 때문에 그만큼 표현하고 싶은 대로 표현하는 것에 마음의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그러한 표면적 현상 이면에는 본인도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어떤 근원적인 두려움이 있는 것 같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면서 각 단계에서만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인간 관계들이 있는데 자의든 타의든 그러한 경험의 기회를 갖지 못했거나 아니면 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legacy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또한 그렇게 표현함으로써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모르거나 이성적으로는 알더라도 제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서로에게 투명한 상호교감이 없으면 사람은 자신의 감정 상태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 내재적 두려움이 겉으로는 화로 분출되는 것이다.

사람이기에 항상 완벽하게 투명할 수는 없고, 또한 완벽하게 상대방과 동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불협화음이 발생할 때 이것을 제때 제때 해소해야지, 쌓아두었다가 한꺼번에 폭발시켜버리면 상처만 남을 뿐 근본적인 해결에 다다를 수 없다. 그리고 모두 드러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표현해야만, 그것이 순간적으로는 손해처럼 보이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더 큰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원인을 상대방이나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탓하지 않으며 외부 사물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을 차별하고 싶지는 않지만,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은 사람과의 교류를 부모님들이 선호하는 이유도 아마 이런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현장에서 뛰면서 많은 사람들을 겪었던 사람이거나. 문제는 자기가 비록 그런 못난 면이 있더라도, 다음 세대에서는 이것이 더 나아져야 하고 또한 나아지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러한 필요성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나마 유년기의 교육을 통해서 이런 부분이 극복되어야 하는데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다면 심각한 문제다. (그래서 나는 학교라는 시스템이 획일화시키는 측면이 있을지언정 최소한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한국의 전통적인 유교 질서에서 윗세대가 아랫세대에 대해 삶의 경험에 의한 노하우와 가치를 전수하는 의무를 빼먹고 효에 대한 권리만 강조하게 되면 더욱 힘들어진다. 물론 아랫세대 또한 그러한 경험을 나누어줌에 감사하고 그에 걸맞는 예를 갖춰야 하겠지만, 이것이 상호교감을 통해 우러나오는 것이어야지 감정이 사라진 의무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을 받는 쪽조차 별로 얻는 것이 없다.

'요즘 젊은 것들도 고생 좀 해봐야 해'라는 말도, 반드시 해야 할 경험을 해봐야 한다는 관점에서는 옳은 말이지만, 단순히 자기가 고생해봤기 때문에 너희도 고생해야 한다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인류가 발전해온 원동력은 문자와 언어에 의한 학습을 통해 앞선 세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삽질은 하지 않는 것이 개인에게도, 인류 전체로 봐서도 더 좋다.

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싶다. 이미 그렇게 고정되어버린 사람들이라도, 음악이라든지 종교의 힘에 의해서라든지 주변 사람들의 노력이라든지 하는 영적 치유를 통해서 (완전히 바뀌지는 않더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보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도록 조금씩이나마 변화시킬 수는 있지 않을까. 서로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불필요한 상상과 그로 인해 유대가 사라지고 권리와 의무만이 남은 상황에서 탈피할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그런 사람들이 '나쁘다' 혹은 '덜떨어졌다' 같이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삶의 과정에서 습득해야 할 것을 주변 환경에 의해 습득하지 못한 것 뿐이다. 그런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내버려둬서는 서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긍정적인 에너지로 동화시켜나갈 수 있다면 우리네 삶이 더욱 아름답게 가꿔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