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breakin Things
때로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낳기도 하지만, 결국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한 세계는 고독하다. 인류가 끊임없이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현대에 와서는 외계생명체를 찾으려 하고 우주로 탐사선을 보내는 것처럼, 세계는 다른 세계를 찾아 헤매인다. 그것은 어떤 한 세계가 어느 정도의 발전 단계에 다다르면 자연스레 일어나는 일이다.
다른 세계와의 만남은 흥미로운 일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두 세계가 만났을 때 서로가 온전하게 남은 채 융화될 수 있을까. 전쟁과 정복으로 점철된 인류 역사가 증명해주듯 한쪽 또는 양쪽을 파괴하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뎠을 때 발생한 전염병과 마찬가지로, 스티븐 호킹이 경고했던 생물학적 장벽과 같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분의 문제가 터질 수도 있다. 만남과 이별의 모든 과정에서, 두 세계가 의사소통하는 프로토콜이 다르다면 더욱 힘들고 어렵고, 의도와 다르게 두려움에서 기인한 폭력성을 띠기도 한다.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고 또 헤어졌을 때, 이미 그 세계는 그 이전의 세계가 아닌 것 같다. 그 흔적을 지우고 원래의 세계로 되돌아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아프고 고통스럽고, 그 세계는 이미 그 과정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이 과정을 처음 겪는 세계는 열병을 앓은 것처럼 흔적이 남는다. 하지만 거기에 참여했던 두 세계는 내연이 더 강해지고, 조금 더 아름답고 멋진 다른 세계들을 만났을 때 보다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과정 속에서 긍정적인 면을 본다.
단, 한쪽을 일방적으로 파괴하고 정복했다면 그 세계는 외연은 강해지겠지만 내연이 강해지지는 않는다. 상호 작용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뭇 종교들이 사랑을 강조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미시적 스케일에서 거시적 스케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계의 만남은 결국 그 근원이 사랑에 기초하고 있음이어서가 아닐까. 인간은 욕구의 동물이고, 그 욕구의 정점은 사랑과 맞닿아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쩌면 지적 사춘기는 끝났을지 몰라도, 인생의 유년기 다음에 한 인간으로서의 사춘기는 이제 겨우 시작일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