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breakin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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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살아가기, 생각하기

요즘 들어서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특히 피아노—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역시 가장 큰 영향은 진혁이 형과 실내악 앙상블 수업일 것이다.

고등학교 때, 피아노를 매우 잘 치는 한 선배와 동기를 만났다. 그러면서 나도 자극 받았다고 해야 될까, 쇼팽과 리스트의 라캄파넬라를 시도했었다. 어떤 무언의 압력이랄까, 사실 그런 것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좀 어려운 곡을 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와서 느끼는 것은, 내가 얼마나 기교가 화려하고 어려운 곡을 치느냐보다, 바이엘을 치더라도 한 곡 한 곡을 제대로 연주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보면 10살 짜리 아이가 라흐마니노프를 치는 동영상도 볼 수 있고, 정말 나보다 테크닉 측면에서 잘 치는 사람은 정말 널리고 널렸다. (더군다나 나는 비전공자니 당연하다)

그러나 정말 자신만의 음색을 가지고 깊이 있게 연주하는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거장"들을 빼고는 많지 않은 것 같다. 10살 짜리 아이가 테크닉적으로 완벽하게 라흐마니노프를 친다고 해도, 그 곡이 담고 있는 감정과 작곡자의 의도 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나도 별로 아는 게 없지만(진혁이 형과 얘기해봐도 항상 이런 배경지식이 딸린다-_-), 연주 자체에 있어서 테크닉보다 곡의 해석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쇼팽은 그의 곡들을 살롱이란 공간에서 귀족들을 앞에 두고 연주했다고 한다. 그런 환경에서 나온 곡들을, 그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온전히 친다는 게 가능할까?)

아까 기숙사에 들어오다가, 요요마가 우리나라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연주회를 한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그가 20대에 냈던 앨범은 "독창적이긴 하나 미국적 스타일을 모방한 것 같다, 너무 가벼운 느낌이다"라는 평을 받았다. 그가 40대 들어서 다시 연주한 앨범은 좀더 완숙미가 드러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50대에 들어선 그가 이번에는 어떻게 달라진 모습을 보일까 하는 내용이었다.

이처럼, 정말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거장들도 인생에 걸쳐서 같은 곡에 대해서도 해석과 연주의 깊이가 달라진다. 정말 파고들고자 하면 한도 끝도 없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음악을 전공하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로 음악에 시간 투자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바탕을 깔고 연주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고 생각한다. 피아노에 대해서 나보다 잘 모르시는 내 부모님도, 내가 이런 생각을 갖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소리가 달라지는 것 같다는 얘기를 하셨다. 테크닉으로는 전혀 발전하지 못했어도 곡에 대한 이해도에 따라 연주의 수준이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내악 앙상블 수업이 무르익어 가면서, 평상시에는 그냥 넘어갈 것 같은 음정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바로잡음에 따라 음악의 질이 높아지고 있다. 점차로 내가 알던 좁은 음악에서, 더 넓게 생각할 수 있게 되고, 그에 따라 나 또한 같이 발전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음악 연주에 관심이 있는 다른 사람들도 이런 내용을 더 잘 알고 있다면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