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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를 읽고 -

  내가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경곽 생활의 마지막 룸메이트였던 민균이를 통해서다. 지난 여름방학 때 친구 준호와 함께 The Feynman Lectures on Physics 원서를 열심히 독파했었는데(중간에 번역본이 나와 버리는 바람에 끝을 못 보긴 했지만) 다른 물리 교재들과는 달리 자기만의 방법으로 증명·유도하고, 자기만의 방법으로 서술하는 것이 독특했다. 그러다가 민균이를 통해서 파인만이 쓴 다른 책들도 접할 수 있었고, 이 책도 그 중 하나다.

  파인만은 이 책에서, 성공한 물리학자로서의 삶, 그리고 그의 학문적 업적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있었던 여러 에피소드들을 정리해 두고 있다. 각 에피소드들을 읽어보면 그의 천재성뿐만 아니라 호기심이 파인만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브라질의 삼바 축제에 즉흥 북 연주로 대회까지 나간다든지, 로스 알라모스의 맨해튼 계획 당시 금고털이 기술을 전문화시켰다든지 하는 것을 보면 그가 머리가 좋은 것도 있었지만 과연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호기심이 모두 그 발단이 되었다.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는 근원은 무엇일까 - What lies beneath? 이 질문에 접근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물리학은 그 중에서도 수학을 서술 방법으로 택한 학문이다. 수학을 택하지 않았다면 철학이다. 며칠 전 인터넷의 한 블로그를 보았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Terra Incognita의 범위는 기준이 무엇인가? ‘인식 가능한 세상’이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이는 매우 가변적이었고, 물리학은 그런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시도를 하였다. 몇몇 용기 있는 사람들의 도전으로 인하여 인식 가능한 세계가 넓어지기도 하였다. 이 인식 가능한 세계는 우리에게 존재하는 세계와 완전히 같은 의미다. 그러나 이 인식 가능한 세계는 실제 존재하는 어떤 세계의 그림자일 뿐, 우리는 겉으로 알 수 있는 정보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아마 환원론적 세계관의 정점인 쿼크와 그 아래의 초끈마저도 어떤 다른 현상의 그림자일 것이다. 그 그림자 너머에 도달하기 위해 인간은 수많은 방법을 동원했고, 물리학은 이성과 논리를 방법론으로 사용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철학은 수학을 사용하지 않으며, 음악과 예슬 등 어떠한 길을 추구하는 모든 행위가 극에 달하면 그림자로의 표상일 뿐인 세계의 벽을 보게 된다. 나와 내 친구들은 길을 걸으며 모든 사람이 다른 방법으로 추구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같은 결과에 도달하게 되는 그러한 답을 단순히 느낌이 아니라 손안에 그러잡기를 바랬다. 물고기가 바라보는 수면 바깥에는 어떤 세상이 존재할까. 누가 어항에 먹이를 주고 공기펌프를 작동시키는 걸까.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 아래에는 무엇이 있는가.
http://inureyes.bluemime.com/forest/index.php?pl=738

  아인슈타인이 여생을 통일장 이론의 완성을 향해 바쳤던 것도, 파인만이 물리학을 시작하게 된 호기심도 모두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인 것이다. 이 궁극적 호기심이라 할 만한 것은 결국 궁극적 동기부여가 된다. 얼마 전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한 친구 녀석이 이른바 ‘슬럼프’ 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못 하던 때가 자주 있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결국 막판에 가서 싸움이 붙었다. 치고받는 그런 싸움은 아니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답답해했던 것을 풀어내는 계기가 되었고, 나는 그 친구에게 그러한 슬럼프 상태를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궁극적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당시 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만 궁극적 동기부여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설명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었는데, 이제는 거기에 호기심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지적 유희’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을 ‘실제적인 효용 가치는 별로 없지만 머리를 굴려서 생각해야 하는 문제들을 풀며 느끼는 재미’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그 재미의 근원은 바로 호기심의 충족에서 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남에게 자기의 포트폴리오를 보인다는 점에서 희열을 느낄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새로운 앎을 얻었다는 것에서 기쁨을 찾는다. 현실에서의 삶이 경제적인 문제와 관련되지만 않는다면, 적어도 내게 있어 최고의 삶은 지적 유희를 즐기는 것일 것이다.

  파인만이 그랬던 것처럼, 한편으로는 나도 내 주류가 아닌 것들을 상당 수준까지 계발시켰다. 내 그림 그리기는 세밀화 풍을 띠면서도 몇 가지 종류의 수성 사인펜으로만 나올 수 있는 독특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고, 내 작곡 스타일은 뉴에이지 장르에 속한다. 피아노 연주는 완벽하게 틀리지 않고 치진 못하지만 딱히 설명할 수 없는 각 곡들만의 분위기와 특징을 파악하며 칠 수는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호기심, 지적 유희에서 비롯한 것이다. 나는 그림 그리기를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릴 때부터 초등학교 4학년 무렵까지 매일매일 내 일과로 삼았다. 그 당시엔 내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린 것이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설령 부모님이 억지로 시키셨다고 해도 거의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그리진 않았을 것이다. 피아노의 경우는 처음엔 부모님의 권유로, 중간엔 강제력으로 배웠지만, 내가 피아노를 친 약 11년의 세월에서 마지막 5년은 누군가한테 배우지 않았고, 순전히 내 호기심에 의한 것이다. 나는 그 호기심으로 작곡과 편곡에도 손을 대었고 어느 정도 나로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파인만이 말하길 자기는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니라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한 거라고 한다. 나 또한 내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과학고 생활을 해 보면 나보다 머리가 뛰어난 아이들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수없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순수한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했기 때문에 나는 대부분의 다른 아이들(내가 경험한 공동체들 내에서)이 갖지 못한 예술 분야의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 선천적인 재능이든 아니든 간에. 호기심의 힘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What lies beneath? 이제는 그 질문을 향해 내 호기심이 가진 잠재력을 발휘할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