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breakin Things

Posted
Filed under 살아가기, 생각하기

스웨덴 시차 때문에 이곳 시간으로 오늘(일요일) 낮이 되어서야 촛불문화제가 시위로 발전하여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인터넷 뉴스와 각종 블로그, IRC 등을 통해 그동안 쌓여온 불만이 한꺼번에 터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다 3개월만에 이 지경까지 온 것일까.

지난 대선 당시 나는 대통령이 되기 힘들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일단은 나름 새로운 정치색을 가진 후보였던 문국현이를 찍었지만, 대부분의 예상대로 압도적인 지지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래도 일단 뽑혔기에, 문국현에 비해 어느 정도 규모 있는 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으니 내각 구성 측면에서는 어떻게 보면 더 잘 할 것 같다는 일말의 기대도 했었다. (문국현의 최근 행보는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모양인데 무턱대고 큰 기대는 하고 있지 않지만 주변에 사람을 끌어모으는 노력을 좀더 해야 될 것 같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나선 대통령이었지만 그가 순수하게 노력을 했든 아니든 간에 이미 모든 경제 지표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정말 이것이 국제적인 고유가와 달러화 약세 등 외부적 요인에 의해 어쩔 수 없는 거라면 정부가 이러이러한 노력을 해서 앞으로 어떻게 개선시키도록 해보겠다라는 희망은 주지 못할 망정 점점 국민들의 불신을 얻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사실 광우병 자체는 냉정하게 봤을 때 약간 과장된 면은 없지 않으나, 이번 사태는 그동안 이명박 정부가 보여준 행동 하나하나에 국민들의 의견 반영이 거의 되지 않았다는 데서 비롯한 것이다. 대운하를 봐도 그렇고 아무리 대선 공약이라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이 뜯어말리는데 굳이 추진하는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다. (혹자의 분석에 의하면 한국 경제를 살리는 방법 중 하나가 고용창출 효과가 큰 건설경기 부양이라는데 단지 그것 때문에? -_-) 이미 그동안 인터넷에서는 이명박을 두고 불도저니 컴도저니 하는 우스갯소리가 한참 전부터 유행했을 정도로 불신이 가득찬 상태였고, 그동안 16여 차례나 계속되며 목소리를 내던 촛불문화제가 결국 씨알도 안 먹혀든다는 생각이 들자 결국 시위로 번진 것이다.

앞으로 전면 재협상이라는 특단의 카드를 내놓을 수 있을지는 불투명해보인다. 임시소집한 17대 국회에서도 이미 야당 반발이 심하다고 하고, 미국의 유력한 대선 후보인 오바마가 한미FTA 재협상을 주장하고 있어 시간적 압박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얼 하건 지금 최우선 과제는 광우병 그 자체가 아니라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있는 것 같다.

스웨덴에 교환학생 와 있으면서 많은 중국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일부 네티즌들은 무조건 중국 얘기만 나오면 짱깨라며 욕하고 걸고 넘어지는데, 중국 사람들도 굉장히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그 중에 정말 중화 사상에 젖은 사람도 있지만, 중국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도 있는 것이다. (양쪽 케이스 다 만나봤다.) 북한 위쪽의 중국 북동 지역--말하자면 만주 지역--에서 왔다는 한 친구는 문화혁명 때문에 제대로 된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부모 때문에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여 여기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중국 전체 인구가 워낙 많기에 그들 중에 아주 조금이라도 이렇게 죽자 살자 공부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숫자는 가히 엄청날 것이다. 중국을 얕볼 수 없는 이유다. 전 세계에 퍼져 살고 있는 화교 네트워크를 생각한다면 정말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사실 국가는 우수한 엘리트 집단들이 사리사욕에 젖지 않고 잘 운영하는 것만큼 이상적인 게 없다. 이상적인 국가라고 볼 수는 없지만 프랑스에선 심지어 그랑제꼴 학생들만 열심히 공부하면 나머지 프랑스인들이 다 놀아도 나라가 돌아간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중국이 문화혁명의 상처를 딛고 지금 이렇게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중국의 넓은 땅과 풍부한 자원, 인구 뿐만이 아니라 국민들의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지도부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 올림픽이 대중들을 위한 선전용이라고 비판하는 중국 사람일지라도 중국 정부의 경제 발전 정책만큼은 신뢰를 가지고 보는 경우가 많다.

한국 정부를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옛날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높은 자리에서 활약하지 못하고 있다. 국회에서 처리되는 법안들을 보면 (그래도 모든 법이 쓰레기는 아니지만) 현실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이 절실히 느껴진다. IPTV나 DMB 관련 법이나, 휴대폰에 걸려있는 WIPI 의무 규제 등--이명박이 경제 살리겠다고 규제 완화 어쩌구 하던데 이런 건 왜 안 건드리나 모르겠다--은 이미 아주 오래된 떡밥이다. 인터넷 뱅킹에 ActiveX 사용을 자제하고 표준화된 보안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얻는 이득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국회의원이 99.9%일 것이다. 당연히 모든 국회의원이 이런 기술적 지식을 해박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면 그것을 들을 수 있고 법에 반영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과 기본 소양은 있어야 할 것이다. 비단 IT 분야뿐만 아니라 문화유산 관리와 한국 문화의 관광 상품화, 중소기업들을 위한 인재 양성 풀 연계, 학문 발전을 위한 전문적인 공공도서관 운영, 중앙아시아와의 자원 외교를 위한 러시아 국제전문가 양성 및 활용, 인문학·수학 등 기초 학문에 대한 투자, 독도 분쟁과 중국의 동북 공정에 대해 외교적 우위를 점하는 것, 해외 거주 국민들의 투표권 행사 보장, 폐핵연료 저장·재처리 시설 건립, 안철수 씨 말처럼 규제 완화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감시 강화 등등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부지기수로 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근본적인 국민의 신뢰가 무너져버렸으니 이제 어찌될 것인지 암담할 뿐이다.

정말 한국에 있는 모든 엘리트 최고 지성들을 모아 정책을 연구하고 그것을 실천에 바로바로 옮겨도 될까말까 할 것 같은데 집권 3개월만에 나락으로 추락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세계 여러 나라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막 눈을 뜨기 시작한 나로선 불안하기 짝이 없다. 물론 대통령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에 의한 정책의 큰 방향 제시는 있을 수 있고 또 그래야 하지만 대통령이 모든 분야에 전문가일 수 없는 이상 전문가 그룹에 의한 정책 검토와 결정은 반드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소수의 엘리트'만'으로 국가가 경영될 경우 부패의 온상이 되기 쉽다. 전문적인 의사 결정은 소수에 의해 이루어지더라도 당연히 국민들의 감시와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 A와 B라는 두 가지 안이 있을 때 A가 더 국익에 우선하지만 어떤 이유로 국민들이 A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차선책인 B를 선택할 줄 아는 융통성도 겸비해야 한다. 아니면 하다못해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지혜와 대책이라도 있든가. 이명박 정부는 그 어느 것도 아닌 것 같다. 정말 제대로 된 전문가들에 의한 의사결정이었다면 지금처럼 무대뽀로 정책을 밀어붙이진 않았을 것이고(최소한 경부운하는 포기했거나 축소했을 것이다), 설령 그게 국익이 도움이 된다 판단되었다 해도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고 있다면 왜 그런지 들어주고 왜 자신들의 이유가 타당한지 설명·설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설득하지 못한다면 안 하는 것이 맞다. (물론 여기엔 국민들의 교육·의식 수준이 일정 정도 이상이어서 터무니 없는 반대나 제안을 하지 않는다는 가정이 깔려있다. 현재 한국은 그래도 그 정도는 된다고 본다.)

세계는 굉장히 빠르게 움직이고 변하고 있다. 불과 몇 주 사이에 자원외교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게 들릴 정도다. 그런 미래를 일정 정도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하며, 또한 항상 새로운 실험과 시도로 과감히 앞으로 나갈 수 있을 때 대한민국이 소위 말하는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ps. 사실 대한민국은 이미 사실상 선진국이다. 한국 안에서 보고 있자면 온갖 문제점들이 보이니 경제만 크고 완전 후진국인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그래도 세계 전체에 내놓고 봤을 때 상당히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근대화의 역사가 그렇게 짧고 자원도 빈약한 가운데 일궈낸 경제 대국과 민주화의 그 위상은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다. 공허한 선진국화를 외치기보다 현실적인 문제들에 핵심을 맞추는 위정자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국은 내가 봤을 때 우리가 당면한 문제점들을 잘 해결하기만 해도 충분히 우리가 염원하는(?) 선진국에 도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