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breakin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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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의 경험이 점점 쌓이면서 요즘 들어 가끔 생각해보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그 사람이 하는 말에는 상식이나 이치에 틀린 것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왠지 그 사람과 대화하고 있으면 싫고 짜증나는 경우가 있다. 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비록 비논리적인 이야기를 할지라도 그런대로 편안하게 받아들여줄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대개 왕따로 귀결되는 것 같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꺼려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잘못은 '논리적 잘못'이다. 그런 사람들과 대화할 때 짜증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자기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한다거나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이런다든지, 계속 자기에게 관심을 달라는 치근덕댐이 뻔히 드러나보인다든지 등이 있을 것이다. 이 마지막 경우가 실은 가장 안타까운데, 사람들이 그 사람을 꺼려하고 피하다보니 더욱더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얻으려고 하고, 이것이 악순환에 빠져들게 만든다.

내가 그동안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주욱 거치면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만나보았는데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지나고 생각해보면 나 혼자만 싫어하는 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대부분 싫어하는 경우엔 반드시 이런 이유가 있었다. 사람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싶지는 않지만 때로는 내 삶을 더 평온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물론 나 자신도 그러하지는 않은지 항상 반성해봐야 할 것이다. 어렸을 때에는 주변 대다수의 아이들보다 학업 성적이 뛰어나고, 한편으로는 매우 순진한 구석도 있었기 때문에 보통의 아이들하고는 질투와 놀림 때문에 그리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그래서 아주 극소수의 친구하고만 아주 깊게 교류했다. 점점 커가면서 중학교 때는 꽤 많은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고 방송부장을 하면서 집약적인 인간관계를 경험하는 등 이른바 사회화 과정을 겪으며 많이 나아졌지만. 어렸을 때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기억이 꽤 있었기 때문에--사실 그게 단지 누구나 겪는 평균적인 수준이었을지라도 기억에는 매우 강렬히 남은 것들이 있다--항상 내가 무언가 말하고 행동할 때 상대방의 반응을 예측하려고 하게 되었고,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좋게 말하면 배려하는 습관이 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나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함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배려하는, 사려깊은 사람이 되기 위해선 일정 부분은 배우는 것도 필요하다. 사람들 중에 보면 전혀 악의적이지 않지만 자신의 일상적인 행동이나 습관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느껴질 수 있는지 미처 모르는 경우들이 있다. 나 자신도 그런 경우가 있었고. 이것은 보통 그 피해 수준이 모호해서 직접적으로 그 불만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인데, 보통 사람 이상의 배려심을 발휘하기 위해선 이 벽도 넘어야 하는 것 같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치며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살 수도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무언가 일을 이루려면 다른 사람들과의 협업이 필수적이다. 모두가 자기 같을 수는 없는만큼 인간관계를 다루는 기술이 참 중요하다. 뭐, 말은 성인군자(...)들의 말씀을 찾아보면 다 나오는 것이긴 하지만 이제서야, 진짜 배울 것이 많구나 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달까.

앞으로 또 어떤 험난한 사람 단련이 기다리고 있을지...

ps. 이런 점에서, 텍스트 기반의 의사소통은 완전히 다른 시점을 제공해준다. 오프라인에서는 그토록 대면하기 싫었던 사람도 온라인에서는 때로는 매우 정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텍스트 매체를 통해 감정 전달 수단이 대부분 거세된 상태에서 기록으로 남으며 이어지는 글줄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느껴지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익명성이 무서운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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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아버지와 일로 만났지만 지금은 친구 사이가 된 어느 사장님과 우리 가족이 함께한 저녁 식사가 있었다. 독신으로 독하게 살아오신, 그리하여 마침내는 성공한 사업가가 된 40대 중반의 여성분이었다. 한달치 식비를 모두 쏟아붓는 엄청난 가격의 5성급 호텔 저녁식사를 사주시면서까지 만나고자 했던, 이야기하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나는 상당히 논리적이고 설명적이다. 무언가를 설명할 때 상대방이 혹시나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서 오해가 생기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는 편인데, 같은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끼리 대화할 때는 괜찮지만 이 분야에 문외한인 사람한테 이야기할 때는 온갖 비유와 은유로 최소한도로 배경지식이나 용어설명을 줄여한다고 해도 자칫 지리멸렬하게 들리기 쉬운 문제가 있다. 그나마 글로 전달하는 경우는 나은데, 실제 대화에서는 너무 말을 길게 한다는 평을 주위에서 듣기도 했다.

그 사장님은 컴퓨터 쪽은 완전히 문외한이시고, 아주 가끔 컴퓨터를 사용하시는 정도였다. 자기가 컴퓨터를 만지기만 하면 뭐가 안 되고 고장난다고 한다. 부모님을 통해 나에 대해 어느 정도는 들어서 알고 계셨지만 실제로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시길래 텍스트큐브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행히 블로그가 뭔지 정도는 알고 계셨기에 그 자체를 이해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거기서 어떤 일을 맡고 있냐고 해서 스킨 표준화와 프레임워크 개발을 한다는 얘기를 하는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아마도 나중에 부모님과 얘기해보니 일정 부분 의도적인 것도 있으셨던 것 같은데, 일부러 엔지니어 성격이 짙은 내게 비엔지니어적 사고의 충격파를 전달해주어 더 깨어있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했던 탓인지, 더이상 비개발자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내용을 설명하다보니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좋았던 점도 있었다. 기술적인 것이 어떻게 되든 실제로 그것이 어떤 가치를 발생시키는가의 관점에서 항상 생각해보도록 실질적인 예를 들어주셨다든지 말이다. 하지만 상업적 프로젝트가 아닌 오픈소스 프로젝트이기에 가지는 철학의 차이나 한계점에서는 결국 논쟁으로 번질만큼 이해시켜드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 배경 설명을 다 하자니 내가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이 얘기는 이쯤에서 정리해두고, 그 뒤로도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그분은 완전한 비즈니스우먼이었기 때문에 항상 핵심 가치만을 듣고 싶어하고, 급하며, 또한 기왕이면 유머와 위트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하는 성향이 강했다. 아마도 좋게 해석하면, 좋은 친구분의 아들에게, 나름대로 머리가 좋다고 하니 사회적 선배로서 더욱 그 능력을 일깨워주고 싶었다고 해석할 수 있겠는데, 내게 요구하신 것은 딱 하나, 유머와 위트를 갖추라는 것이었다.

그 뒤에도 반론과 반론의 반론이 오고갔지만(물론 위스키와 함께 매우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 정도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거의 모든 일에 진지한 편이다. 요즘 한창 뜨는 TV 프로그램인 '패밀리가 떴다'에서 진지 청년으로 나오는 장혁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을 웃기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즐거움을 추구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은 그러한 즐거움의 일부를, 진지해야 할 것으로 기대받는 사회 속에서 유머를 통해 찾는다. 그것이 주변에서 충족되지 않다보니 이른바 예능계 연예인들이 뜨는 것이고, 또한 유머러스함을 갖추는 것이 하나의 덕목이 된 것일 테다. 이제는 유머와 위트가 없으면 더이상 사람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키기 어려운 것일까.

일상적인 대화에서 중간중간 상대를 웃게 만드는 유머와 위트는 사실 고도의 집중과 맥락적 흐름을 머릿속에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힘든 일이다. 요 근래 집에서 지내면서 가끔씩 TV에서 하는 개그·예능 프로그램들을 보는데 가볍게 망가지면서 웃기는 것도 있지만 말빨 좀 선다 하는 MC들은 그때그때 다른 사람들 말의 이전 문맥을 활용해서 재치로 비꼬는 것을 아주 잘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천적으로 사람들을 쉽게 웃길 수 있는 말투와 넉살을 타고났다면 모르겠지만, 나같이 진지한 사람이 유머와 위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그런 수준의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과연 모든 사람이 진지해야만 할까 하는 질문과 마찬가지로 과연 모든 사람이 유머가 넘쳐야 할까 하는 질문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진지함에서 묻어나오는 또다른 맛의 재미도 있는데 말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부분이 내 한계일 수도 있다. 사람마다 다른 것을 어찌하리오. 그 사업가분과의 만남은 대화 중의 몇몇 구체적 사례에서 역으로 생각해보는 관점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어떤 것이 사람을 열정에 찬 모습으로 보이게 만드는지 알게 해주었다는 점에서는 좋았지만, 그분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어도 마치 모든 사람이 사업가적 기질을 가져야 한다고 무언의 강요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은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유머와 위트가 싫은 것이 아니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주변의 평에 의하면 나도 옛날보다는 그런 면이 많이 발달했다고 하고, 어쩌면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보통 수준은 익히게 될 수도 있다. 일종의 충격 요법이었을까? 하지만 난 이미 명시적이진 않더라도 암시적으로는 삶의 다면체를 더욱 풍부하게 해주는 다른 면을 느끼고 보고자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자극은 일부분 거부감이 든 것도 사실이다.

요즘에 하는 생각 중 하나가, 좁은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리더십을 가져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 모두가 (좁은 의미의) 리더십이 너무나 충만하다면 이 세상이 과연 잘 돌아갈까? 리더가 리더이기 위해서는 참모도 있어야 하고 리더의 생각을 실행할 사람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리더십을 이야기한다면 모를까. 더 넓게 보면 인간이라는 한 개체로서 세상사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은 내면의 욕구가 거대한 사회적 덕목으로 표출되는 것일지도.

이런 반박을 하는 이유는, 이전에도 몇 차례 언급했던 지적사춘기에서 하는 일이 사실 사람들이, 혹은 사회가 절대 덕목이라고 말하는 가치들을 다시 한 번 내 나름대로 반박해보고 부수어 보면서 그 결과를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내 가치관과 생각의 주관성을 다듬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현대 사회상에 대한 꽤 괜찮은 반박을 한 것을 꼽으라면 마인하르트 미겔의 「성장의 종말」쯤 되겠다.

아무튼 그분과의 만남은 진지함과 유머의 균형에 대해 삶의 무게추를 어떻게 놓을 것인가 하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끔 해주었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이것이 가장 큰 수확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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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하고 적지 않았었는데, 고등학교 동기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일도 사실은 2008년을 돌아볼 때 사람의 재인식에 함께 영향을 준 사건이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 또다른 죽음이 찾아왔다. 우리 어머니께서 지금 사는 아파트에 이사온 후로 근 2년 이상 아주 가까이 지내오시던 같은 라인에 사시는 분이 결국 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횡경막 암으로 시작하여 항암치료만 6~7회 이상 이어지고 잠시 괜찮아졌을 때는 어머니와 함께 동네 뒷산에 함께 오르기도 하셨었다. 나이는 50대 중반이니 아직 한창 사실 나이고, 공무원이신 남편분과 아들 2명(나한테는 형들)이 있는데 두 형 모두 아직 결혼은 못한 상태였다.

같은 라인에 살면서 자주 만났기 때문에 그집 가족들하고 우리집 가족들하고도 잘 알고 있는 사이다. 이사올 당시 예비신자셨던 그분을 어머니께서 자주 왕래하시며 독실한 신자로 이끌어주기도 했고, 말기 암환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도 했는데 나 또한 요 근래 계속 집에서 지냈으므로 이런 전후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며칠 전에 『뇌, 생각의 출현』이란 책을 다 읽었다. 우주의 탄생과 원자, 분자를 거쳐 DNA가 만들어지고 세포를 이루며 이것이 점점 진화해나가면서 어떻게 뇌가 변화되었는지에 따라 우리가 말하는 의식의 정체가 무엇인지 쓴 과학교양서적이자 기나긴 에세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도 해봤던 질문이지만 우리의 의식, 혹은 자아 인식, 더 나아가 영혼이라고 불리는 그 무엇이 단순히 뇌의 특정한 활동 상태의 스냅샷에 지나지 않을 것인가 하는 골치아픈 이야기가 다시 떠오르기도 했다. 정신병자는 영혼이 고장난 것일까 뇌가 고장난 것일까 같은 문제와 마찬가지로. 얼마 전 본 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에서 클라투가 '인간이 죽으면 단지 다른 형태로 변화될 뿐'이라고 표현한 것도 떠오른다.

갑자기 연속으로 두 차례의 장례에 조문을 다녀오면서, 그전에는 막연히 '과학적 관점'에서 죽음이란 별다른 특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많이 바뀌었다.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단지 그 사람의 육체가 지구의 거대한 순환 시스템을 구성하는 원소로 분해되는 이상의 것이 있다는 사실 말이다. 영혼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돌아가신 분의 영혼이 천국에 가시든 윤회로 다른 곳에 태어나시든 간에, 어쨌든 지금 현실에 살아있는 우리들과 더이상 만날 수 없고 의사소통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히 사람에게 있어 안타까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정사진을 보며 언젠가 나도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저렇게 해야 할 텐데라는—인간이 가진 강력한 능력 중 하나인 감정 이입 덕분에—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쯤 가면 더이상 죽음에 대해 과학과 논리로만 설명되지 않는 듯하다. 내가 근 몇 년 동안 흘려본 슬픔의 눈물보다 많은 양을 이날 흘렸던 것 같다.

조문과 연도를 마치고 그집 작은형과 인사하는데 갑자기 나를 와락 껴앉으며 흐느꼈다. 와줘서 정말 고맙다고.

이번 연말연시를 지나면서 그동안 막연하게 뉴스와 영화로만 접했던 죽음에 대해서 완전히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 여전히 과학적으로 죽음을 설명하는 논리에는 변함이 없겠지만, 그 이면에 남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눈을 떴다고나 할까. 집안에 다행히 돈이 좀 있었는지 남편분이 마지막까지 산삼주사까지 놓으며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그래도 말기암과 죽음 앞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세상사 덧없고 허무한 일이라는 것과 동시에, 유한하기 때문에 더욱 재미있게 살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중적인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