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breakin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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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살아가기, 생각하기

이번 주 금요일에 할 이사를 대비하여, 15년 동안 버리지 않고 보관해왔던 내 그림 작품들을 정리했다. 유치원 다니기 이전부터 초등학교 4학년 무렵까지 8절지 스케치북에 사인펜을 이용하여 그린 수백장의 그림들을 일일이 다 뒤져보고 골라냈다. 주로 완성도, 구도, 소재의 독창성이나 특이함, 그림 기법, 세밀한 묘사 등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그림들의 존재는 아직까지 우리 가족이나 부모님과 가까운 분들 외에는 거의 모르고, 딱히 전문가에게 감정(?)을 맡겨본 적은 없지만, 내 스스로도 놀라웠다. -_-;

그 그림들을 정말 일일이 다 들여다보았는데(지난주 주말, 이번 주말 도합 3일이나 걸렸다), 그 중 어떤 것은 직접 그리던 게 생각나는 것도 있지만 아주 어렸을 때 그린 것들은 생각나지 않는 것도 많았다.

재료로는 가장 많이 사용된 모나미 12색 사인펜(...)부터, 한때 유행했던 은색·형광펜, 또 만화가나 건축가들이나 쓴다는 로트링 펜, 아버지가 외국 출장 가서 사다주신 수채색연필, 파스텔, 크레파스 등이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친구로부터 알게 된 일본제 PlayColor 펜과 모나미 사인펜이 그중 95% 이상이라고 보면 된다.

소재는 극초창기의 동화 내용, 자연물(주로 지표면과 그 위의 식물·동물들 상상화)부터 시작하여 각종 과학책을 보고 그렸던 내용(판구조론, 대기권 구조, 태양계, 인체 해부, 개미집, 공룡, 말벌집, 수달집 등), 그리고 우주 도시나 공중 도시, 미로, 지구 멸망(운석 충돌), 각종 재난(화재, 홍수 등), 콘솔 게임으로 했던 쥬라기 공원과 슈퍼마리오 및 PC로 했던 레이멘 게임의 스테이지 디자인, 화려한 단청을 가진 궁궐, 기와와 초가로 이루어진 마을 풍경, 그림을 그릴 당시의 주요 사건들(이라크 전쟁, 무궁화 위성 발사, 화성 탐사선, 목성에 충돌한 혜성 등), 현대 및 전통 건축물의 단면, 각종 건설 광경, 상상으로 만든 각종 설계도(?)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다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형은 내가 그린 그림들만 봐도 웬만한 과학 공부는 되겠다고 했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스케치북을 가로지르는 정도의 선을 그을 때도 어떻게 떼지 않고 한 번에 그어내려갔는지 '펜 터치'가 신기하다고 하셨다. (물론 선을 실제 보이는 것처럼 똑바로 긋진 못하고 좀 삐뚤빼뚤하긴 하다)

초등학교 4~5학년을 거치면서부터 컴퓨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때 그린 것들은 주로 연습장에 그린—그래서 별로 남아있지 않은—세밀한 미로들과 나름 여자친구(?)라고 할 수 있었던 유정은(...이 아이가 지금도 날 기억할련지는 모르겠다-_-)과 합작하여 그려 나눠줬던 그림[footnote]낙엽 떨어지는 나무 아래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모습인데, 낙엽과 나무 및 주변 동식물의 세부 묘사를 내가 했고, 화가 인물을 정은이가 그렸다. 재료는 0.5mm 샤프펜슬이었고 기간은 대충 2~3일 정도 걸렸던 것 같다. 당시 여자 아이들에게 꽤나 인기있는 그림이었다.[/footnote] 정도다—물론 이것도 애들에게 다 나눠줬으므로 현재 나한테 남아있지는 않다. 5학년 2학기부터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접했고, 6학년 때 Visual Basic을 접하면서 이제 다들 알고 있는(?) 지금의 내가 된 것이다.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에는 내 스스로 그동안 사용해왔던 그림 기법들을 몇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 정도에 다다랐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이후로 8절지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린 적은 거의 없지만, 알림장이나 필기노트에 각종 그림문자와 장식을 함으로써 그림 감각을 꾸준히 유지(?)해왔고, 대학에 와서도 손으로 써서 내는 선형대수학개론 숙제 등의 각 chapter 번호 등을 장식(.....)하기도 했다.

이 그림들을 보면서 그림 실력이 발달하는 과정은 물론 내가 가진 정신적 특질의 몇몇 부분들의 기원도 볼 수 있었다. 이를 테면, 나는 소스코드에 주석을 매우 잘 다는 편인데 이것이 그림에도 잘 나타났던 것이다. 그림에서 다른 사람이 잘 못 알아볼 것 같은 부분에 대해서는 글자로 써서 설명을 달아놓은 곳들이 꽤 있었다. (가끔은 전혀 관련없는 당시 집전화번호를 쓰기도 했다. -_-) 또한, 나는 대체로 맵에디터가 없는 게임은 잘 안 하려고 하는데, 뭔가 마을이나 도시 이상의 스케일을 가지는 큰 구도의 그림들에서는 거의 건설을 하는 장면이나 뭔가 기존의 지식이나 상상에서 customize하려는 부분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정말 신기했던 건, 내가 그린 사실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초창기(초등학교 1학년 무렵까지?)의 작품들의 주제가 지금 내가 생각해도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기 힘든 것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척추, 척수, 동맥과 정맥이 구분된 혈관, 뇌, 뼈 등을 묘사한 머리 단면도라든가, (비록 사실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벽 속의 전기 배선 구조를 생각해서 그린 건물 단면도 등은 나 스스로도 보면서 '내가 이 나이 때에 어떻게 이런 걸 그렸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_-;; ...심리학개론 시간에 분명히 Piaget의 인지심리발달이론에 따르면 7세 무렵까지는 '전조작기'로서 수의 개념을 다루기 시작하거나 보존원리[footnote]물체의 모양이 변해도 그 양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 Piaget의 경우 일정량의 물이 세로로 긴 컵과 가로로 넓은 컵에 들어있을 경우 그것이 같은 양이라는 것을 앎을 뜻한다.[/footnote]를 이해하기 시작한다고 나와 있던데.; 사실 이런 그림은 수의 개념을 몰라도 '상상'을 잘 하면 그릴 수 있는 것이기는 하니까 직접적인 관계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eidetic memory[footnote]언어가 형성되기 이전의 유아들은 사물이나 장면을 기억할 때 언어적 묘사 없이 마치 사진 찍듯이 기억한다고 하는데, 그러한 유형의 기억을 이르는 말.[/footnote]가 떠오르는 건 왤까?

...뭐 어쨌든 어렸을 적의 추억도 되돌아보고, 어렸을 때 내가 이런 동화, 이런 책들을 읽었었구나 하고 알 수 있기도 했고(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초등학교 1학년 무렵 완독했던 과학앨범의 영향이 상당했던 건 확실하다, 또 재미있는 작품들을 감상(..내가 그려놓고 내가 감상하다니...-_-)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응달에서 비교적 일정한 기온으로 유지, 밀폐된 상태로 보관한지라 종이나 펜터치 등의 상태는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었다. 오히려 옛날 스케치북일수록 종이가 두꺼워 잘 보존된 것 같다. 이것을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스캔해놓든지 몇 개 골라서 액자나 판넬을 하든지 해야지 그냥 창고에 쌓아두기에는 너무 아깝다. 하긴 부모님 얘기 들어보니 어렸을 때 아는 몇몇 사람들이 전시회 열어주라고 했다던데 정말 그래야 되나.. -_-;

덧. 내 그림 스타일의 일부(?)는 여기서 볼 수 있다. 몇 안 되는 최근 작품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