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키루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다시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구구절절 설명이 귀찮은 사람들을 위한 세 줄 요약:
- 빠져죽을 만큼(...농담이 아니고 정말로.)의 눈을 보고 싶은 사람은 한겨울의 키루나에 꼭 가볼 것.
- 사진으로 봐온 것 같은 오로라를 맨눈으로 똑같이 보기는 쉽지 않다.
- Dogsled(개썰매)와 Snowmobil과 같은 투어 추천!
- ...그리고 +alpha: 공항엔 최소한 2시간 전에 도착하도록 하자(............OTL)
※ 사진은 본문이 너무 긴 관계로
링크로 대신합니다. (Flickr Set)모든 것이 매끄럽게 잘 진행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사람 일이라는 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다. 뭐 태어나서 비행기 타본 거 몇 번 안 되긴 하지만 결국 드디어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국제선도 아니고 단거리 국내선이니까 수속에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 비행기 뜨기 1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했다. 사실 모든 게 매끄럽게 진행된다면 어지간해서는 부족하지 않을 시간이다. 그런데 일단 Terminal을 잘못 찾아가서 다같이 길을 헤매는 바람에 한 20분 잡아먹은 것부터 시작해서, 중간에 갑자기 환전한답시고 버벅대고(같이 간 일행 중 두 명이 프랑스에서 왔기 때문에 스웨덴 크로나가 별로 없었던 모양인데 또 신용카드로 환전한다고 10분 정도 걸림), 원래 기계로 automatic check-in이 가능한데 그걸 모르고 줄서서 기다려서 check-in하려고 하니 이미 gate closed라며 안 들여보내주는 것이다. (아마 이렇게 삽질했어도 처음부터 바로 기계로 했으면 약간 아슬아슬하게 탔을 듯?)
한 마디로 비행기 놓쳤다.게다가 이게 표가 싼 거라 그런지 조건이 불리해서 환불이나 다음 비행기편으로 대체해주는 것 따위는 전혀 없었다. (사실 return ticket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결국 새로 편도 비행기표를 끊어야 했는데 시간을 보니 다음날 낮 12시. (....) 사실 실제 수속은 15분만에 끝났으므로, 처음부터 헤매지 않고 제대로 된 터미널에 들어가서 automatic check-in하고 바로 짐실어보냈으면 환전 다 하고 커피 한 잔 해도 될 정도의 시간이 남았을 텐데 정말이지 다들 (한 번씩 와본 적이 있는) Arlanda 공항에서 그 정도로 헤맬 줄은 예상을 못했던 것이다. ㅜㅜ;
공항에서 밤을 샐까 하다가 시간도 늦어서 스톡홀름으로 돌아오기도 그렇고(약 50km 정도 거리) 그래도 시간이 이건 너무 길다 싶어서 근처에 하룻밤 묵을 곳이 없을지 찾아보았다. 공항 안에는 2개의 호텔이 있었는데 하나는 우리가 원하는 정도의 싼 가격대로 잠만 딱 잘 수 있는 곳이나 자리가 없었고, 하나는 별 4개짜리 호텔이어서 너무 비쌌다;; 다행히 그 호텔의 리셉션 직원이 친절하게도 공항 근처 다른 호텔에 직접 전화 연락으로 자리도 알아봐주고 호텔 목록도 알려주어서 무료 셔틀버스 + 아침 식사 포함하는 보다 싼 호텔을 찾아 하룻밤을 편히 묵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Kiruna에서 싼 숙소를 얻어 15만원 정도 아꼈다고 생각한 만큼의 돈을 거의 그대로 이 삽질에 쓴 셈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최초 예산에서 오버되진 않았다. -_-)
캠프에 도착해서는 캠프 주인 아저씨한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는 투어 일정을 모두 바꿔야 했다. 그래도 이분들이 워낙 친절하기로 소문난(?) 사람들이라 그런지 종이 빼곡하게 적힌 수많은 메모를 휘저으며 프로그램 재편성을 해주었다. 당장 그날은 시간이 애매해서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에 캐빈에 짐을 풀어놓은 후 언제나 투어 일정이 시작되는 equipment house와 sauna가 있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우리가 있는 캐빈은 이 캠프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고, 그런 식으로 캐빈들 서너 개씩이 모인 단지가 큰 호수 주변에 흩어져 도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호수는 눈이 오면 반대편이 보이지 않을만큼 컸고, 최소 50cm 이상의 두께로 완전히 꽁꽁 얼어있었다. 혹시 얼음깨지는 거 아닌지 사람들이 여러차례 물었는데 절대 그런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Ice-fishing 용 구멍을 누가 뚫어놓은 게 있어서 내 키의 3분의 2쯤 되는 막대기를 집어넣어보았는데 구멍 끝이 느껴지지 않았으니 못해도 대충 내 키 정도는 얼어있단 얘기다.
사우나는 호수 위에 떠있는(...이지만 얼음이 꽁꽁 얼어 눈이 덮인 관계로 지상의 건물과 구분되지 않는다) 자그마한 플랫폼 위에 건물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다. 나무로 만든 방 안에 난로가 있고 그 위에 뜨겁게 달궈지는 돌덩어리들이 있어 거기에 직접 눈을 녹인 물을 부어 동작시키는 원리였다. 중국 친구들이 부끄러워(?) 했던 관계로, 또 마땅히 갈아입을 옷도 안 들고 있었던 관계로 사우나를 직접 하진 않았지만,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왔다는 애들이 안에 있다가 문열고 뛰쳐나와 알몸으로 눈속에 파묻히고는 다시 호들갑 떨며 뛰어들어가는 모습을 여러차례 볼 수 있었다.
호수 중간에 낚시용 전초기지(?)가 하나 있어서 일행들과 함께 같이 가보았다. 중간부터는 눈이 무릎까지 빠져서 걷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 위에 올라가 있으니 정말 여기가 겨울의 세상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다만 여기서 내 신발이 눈에 적합하지 않은 것인지라 발이 너무 시렸던 관계로 혹시나 모를 동상 예방을 위해 나는 먼저 돌아와 발을 녹이고 양말을 말려주었다. 다행히 그 캠프에 묵는 사람은 크로스컨트리 스키 장비를 무료로 가져다 쓸 수 있었으므로 신발만 빌려서(...) 그 뒤로는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
어쨌든 비행기 놓치는 것과 같은 나쁜 일도 있으면 좋은 일도 있는 법. 전날 지독하게도 눈이 많이 내려서 낮 비행기가 취소되기도 했다는데 다행히 우리가 도착한 날은 날씨가 상당히 좋아서 밤에는 아주 청명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곧 오로라를 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또한 새로운 눈이 쌓여서 더 아름다운 설경을 볼 수 있음을 뜻하기도 했다.
오로라를 실제로 보면 어떨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내가 한 마디 하고 싶은 건 너무 큰 기대는 금물(...). 오로라 강도가 계속 변하니까 어떤 때는 맨눈으로도 만족스런(?) 오로라를 볼 수도 있다고 하지만, 보통은 아주 희미한 푸른빛이 지평선 언저리에서 아른거리는 정도다. 정말로 희미하고 꽤나 천천히 움직이기 때문에 얼핏 보고 지나치면 멀리 있는 도시의 불빛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카메라로 노출 15초를 주고 그 결과를 확인한 순간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림으로나 보던 그런 오로라였다. (다만 사진기도 이런 악조건에 별로 적합하지 않았던 데다 내 기술도 별로 없어서 노이즈가 OTL... 그나마 같이 온 일행들은 사진 한 장조차 건지지 못했다는 데서 위안을...?) 아마도 우리가 처음 숙소대로 Kiruna 시내에 묵었다면 못 봤을 것이다. 실제로 나중에 만난 사람들 중에 시내에 묵었던 사람들은 못 봤다고 했다.
인공의 불빛이라곤 저 멀리 18km 떨어진 키루나 시내 상공의 구름에서 산란된 옅은 오렌지빛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청명한 밤하늘 속에 깔려죽을 만큼의 별빛이 쏟아졌고 오로라가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었다.....라고 하면 너무 시적일까; (아, 왠지 p모님의 문체를 닮는 것 같.. =3=3) 분명치는 않았지만 은하수로 짐작되는 별무리 띠도 볼 수 있었고,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백조자리의 일곱 별들과 오리온자리, 그리고 오리온 대성운까지 맨눈으로 볼 수 있었다. (오리온 대성운의 경우 분명하게 보기는 힘들고 뭔가 그 자리에 있다는 정도만 아른거리는 정도. 시력 2.0 정도 되고 야맹증이 없는 눈이 좋은 사람이라면 형체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혹은 카메라가 좋거나.) 그네들은 언제나 거기서 똑같이 빛나고 있는데, 사람이 스스로 가리개를 만들어 씌워놓고는 이런 곳에 찾아와서 신기하게 느낀다는 것이 역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인공의 불빛이 아닌 밤하늘 그 자체의 빛만으로 밝혀진 눈밭을 걸어보는 경험을 내가 언제 또 해볼 수 있을까. 영하 20도의 추위에 콧물까지 얼어붙었지만 다행히 바람이 불지 않아 이명이 들릴 정도의 고요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우리의 목소리, 움직임, 그리고 간간이 들려오는 먼발치의 개 울음소리 말고는 들리는 소리가 전혀 없었다.
잠시 후 뒤가 밝아오기 시작했다. 뭐지 하고 돌아보니 울창한 침엽수림의 눈덮인 나뭇가지들 사이로 뭔가 희끄무레한 빛덩어리가 빛나고 있었다. 처음엔 무슨 X-File 실험실이라도 있는 건가(...) 했다가 점점 떠오르는 그 자태는 과연 달이었다. 전날인가 전전날이 정월대보름이었으니까 이 또한 눈부시게 밝은 빛을 선사해주었다. 밤하늘의 다른 모든 빛들을 압도하며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를 뚫고 거대하게 서서히 떠오르는 그 모습은 지금의 우리뿐만 아니라 전깃불이 없던 시절의 사람들에게 밤의 동반자가 되어주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경이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다음날 있을 투어를 위해 잠을 청하며, 더이상 상념에 젖을 틈도 없이 그대로 깊이 곯아떨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