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breakin Things
연말이면 으레 하는 블로그 포스팅. :)
동아리 세미나로 정신없이 시작한 겨울방학과 스웨덴 출국준비로 어수선하게 시작했던 2008년은 여유롭고 평화롭게 글을 쓰며 지나가고 있다. 2004년 11월 말에 이 블로그를 시작했으니 벌써 이 블로그를 운영한 지도 만 4년이 넘었다. 그때부터 쓴 글들은 아직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물론 특정한 플러그인이나 태터툴즈 시절의 커스터마이징에 의존했던 부분들은 제대로 서식 처리가 안 되는 것들이 있긴 하지만 내용 자체는 살아있으니.) 이 기록들이 쌓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초창기에 쓴 글들을 보면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 자체도 나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시간축을 중심으로 하는 블로그를 통해 올해의 나를 기억하는 키워드를 꼽아본다면 사람에 대한 재인식과 나 자신에 대한 재확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예전에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줄거리 자체에 집중하거나 그 작품의 소재, 혹은 얼마나 스펙타클한지와 같은 특수효과 등에 주안점을 두었지만, 요즘은 배우들의 심리묘사에 집중하는 편이다. (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 '스타의 연인'이 그런 점에서 내 욕구를 잘 충족시키는 듯하다.) 예전에는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의 표정 변화가 새롭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스웨덴 교환학생 생활을 하면서 전세계의 내 또래 젊은이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을 보는 눈이 조금 더 넓어졌다고나 할까. 11월 말에 있었던 대안언어축제 & P-CAMP에서 현업 개발자·중간관리자 분들과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면서 막연하게 '일보다 사람'이라고 알고만 있던 것들이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어떻게 보여지는지 알 수 있었던 것도 이에 한몫했다.
원래는 구글에서 인턴을 하려고 했지만 아쉽게 기회가 닿지 않아 집에서 푹 쉬게 된 가을엔 또다른 수확이 있었다. 5년 넘게 과학고·카이스트의 기숙사 생활에 해외 교환학생까지 하느라 오랜 시간 함께하지 못했던 가족들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었던 것. 중학생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님의 세계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으며, 종교적인 문제부터 여자친구 문제와 금전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더욱 성숙된 이야기들을 함께 다루면서 동반자적 관계를 더욱 발전시켰다. 물리적으로 가까이 지내면서 그동안 가져보지 못했던 감정들을 다시 꽃피울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이 이 사회의 조류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또 나는 우리 가족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생애 설계를 가족과 함께할 수 있음도 확인했다.
스웨덴 교환학생 생활은 그동안 거의 제대로 써볼 기회가 없었던 내 영어 실력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영어만 통하는 곳이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는 있겠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내가 고급 영어를 구사한다거나 한국어 말하듯 영어가 술술술 흘러나오는 건 아니지만, 외국인과 대화를 시작하는 데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고 영어로 된 긴 텍스트(소설 같은)를 읽는 것에 대한 부담도 많이 줄었다. 이를 통해 내가 그동안 영어를 적어도 '헛공부'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하나 중요한 줄기는 텍스트큐브 프로젝트다. 올해의 키워드로 많이 뽑히는 변화, Change, Transition, 이들이 아주 잘 들어맞는 상황이다. 변방의 자그마한 오픈소스 프로젝트였던 텍스트큐브가 3년째에 접어들면서 구글의 태터앤컴퍼니 인수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어쨌든 3년 동안 한 우물만 팠더니 그래도 뭔가 건질 만한 건 나오더라'하는, 내 관심에 대한 대가를 확인하고 있다. 아직 학부 졸업도 하지 않은 학생 신분이기에 더욱 크게 다가왔는지 모르겠지만, 제주대학교 강의라든지 구글맵 파트너데이 발표 등 굵직한 일에 직접 참여하면서, 이런 일들을 통해 여러 경로로 내 능력을 사기 위한 제안도 받아보고 하면서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어느 정도 얻었다.
게다가 출판사를 통해 직접 책을 쓰기로 하고 출판 계약을 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도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경기 불황의 여파로 이 책이 얼마나 팔릴지에 대한 고민 때문에 출판사하고 책의 출판 형태나 구성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 중이라서 쉽사리 책이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가진 또 하나의 다른 가능성을 열어보고 인정받은 셈이니까.
한편 이에 따라 새로운 과제로 남은 것은 정말로 내 전문성을 객관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어떤 것들을 준비해야 하는지, 또 앞으로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서 절제와 겸손의 미덕을 갖추는 것들이겠다. 또한 내가 삶의 목표 중 하나로 삼고 있는—내 능력을 활용하여 사람들에게 가치를 주는 것—을 잘 실현하기 위해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도.
그리고, 아직도 지적 사춘기는 현재진행형이다. 막연한 공상과 사고실험을 넘어 좀더 현실적으로 휴학 기간을 활용해 다양한 책들을 접하면서 느끼는 것들이 있는데, 아직 정리할 단계는 아닌 것 같지만 내 삶을 지탱하기 위한 나름의 인식 체계는 조금씩이나마 그 틀을 잡아가는 것 같다.
광우병 촛불집회, 국회 파행 운영, 미국발 경제한파 등 사회적으로는 큰 변화를 겪고 그동안 쌓여온 부작용들이 한꺼번에 표출되고 있는 2008년이지만 다행히 나 개인의 삶은 더욱더 큰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해준 해였다. 앞으로 2009년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더욱더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 없다. 당분간은 학업을 계속하겠지만 그 와중에 또 어떤 재미난 기회들이 나를 찾아올지 기대된다. 단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대한민국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병역 의무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결국 입영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오고...ㅠㅠ)
노정석님이 WoC WDay에서 발표하신 것처럼 아직 인생의 굴곡을 별로 겪어보지 않은 탓에 지나치게 미래에 대한 희망만으로 가득차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아직 나는 20대의 시작에 서있고 이 축복받은 시간들을 기왕이면 희망차게 보내면 좋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