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바였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영어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한국은 그야말로
영어 돌풍인 모양이다. 작년에 '강남 엄마 따라잡기'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여러 가지 의미로) 많이 웃었는데, 가끔 다른 블로그에 관련 글이 올라오면 댓글만 장황하게 달아오다가 내 생각을 한 번 정리해보기로 했다.
요즘은 초등학교 때부터 특목고 입학을 준비시킨다고 하고, 대학에서 운영하는 영재교육원 입학을 위한 입시반까지 학원에 있을 정도라고 한다. 내가 과학고 들어갈 때만 해도 과학고 준비는 보통 중학교 1~2학년 때쯤 시작하는 것이 이른바 발빠른(?) 사람들이었는데 지금은 또 기준이 더 내려간 모양.
부모들이라면 당연히 내 자식만큼은 똑똑할 거라는 기대를 가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좋은 직장'을 얻기 어렵다는
점이나 한국 사회가 돌아가는 꼴이 맘에 안 든다 등등의 이유로 돈 여건이 조금이라도 받쳐준다면 유학을 보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자니 경쟁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조기교육이다 뭐다 해서 기를 쓰게 되는 듯하다.
나름대로 한국의 학부모들이 높게 평가할 만한(..그나마 요즘은 목표가 유학인지라 시원찮은 듯하지만) 과학고-카이스트 코스를 걸어오고 있는 학생으로서 내 생각은 이렇다.
나의 조기교육·선행학습 경험하지만 내 경우를 되돌아보면 부모님이 속으로는 내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셨을지는 몰라도 겉으로는 경쟁에 이기기보다는 나 자신을 신뢰하라는 쪽으로 항상 말씀해주셨다. 나한테 조기교육이라고는 초등학교 때 구몬학습지 조금 풀었던 것과 초등학교 4학년 때 원어민 영어회화 학원 두 달인가 다니다 때려친 게 전부다. 아무런 선행학습도 안 하고 그냥 학교 내신만 때우고 있다가 중학교 3학년 때 한 선생님의 권유로 우연히 정보올림피아드에 나갔고, 또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과학고에 지원해보라길래 딱 3개월 동안 조그마한 동네 학원에서 죽어라 공부할 때도, '반드시 과학고에 입학해서 가문의 명예(?)를 떨쳐야 한다' 식의 압박 이런 게 아니라 '실패하더라도 이런 도전 경험 자체가 중요하다', '너 자신을 믿어라' 하는 쪽으로 주로 말씀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과학고 입학이 결정되고 나서, 부족한 선행학습을 때워보겠다고 이른바 '고액 과외'라는 걸 잠깐 해보기도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처럼 딱 3개월 벼락치기로 과학고에 들어온 케이스가 거의 없었고, 남들은 중학교 경시를 바탕으로 물리1, 물리2 선행학습해서 고등경시 대비한다고 난리칠 때 나는 경우 공통물리도 제대로 다 못 떼었고 미적분도 잘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지내놓고 생각해보면 그때 배웠던 거(부모님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특히 제일 비싸게 주고 했던 그 과외..) 하나도 생각 안 났고 별로 써먹은 듯한 느낌도 없다. 고등학교 들어가서 수업 처음 들었을 때도 수업 진도가 빠르고 양이 많다는 정도의 느낌이었지 중학교 교과 과정을 100% 충실하게 이행했고 과학고에 들어올 수준의 학생이라면 완전 안드로메다 여행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첫 시간 류한영 선생님이 설명해주시던 칸토어 집합 얘기는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다.
고등학교 때도, 학교에서는 한 사람이 반드시 하나의 경시 과목을 선택하여 무조건 경시대회에 참가를 시키곤 했었지만 나는 정보경시도, 경시 과목으로 택했던 물리경시도 출전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지원하라고 해서 나갔던 건 모조리 낙방.) 대신 내가 고등학교 때 주로 했던 건 R&E 사사연구, 과학전람회, 창의력경진대회, 휴먼테크 논문대회 등이었다. 내신은 중상위권을 꾸준히 유지했고, 이것은 수업을 충실히 듣는 것만으로도 가능했다.
나중에 대학교 올라와서 1년여가 지났을 때 과학고 친구들과 야식을 시켜먹으며 했던 얘기가 있다. 그렇게 죽도록 조기교육이며 선행학습, 경시공부 해봤자 진짜 전공 들어가니까 말짱 헛것이라고. 미친 듯이 문제 풀어제껴서 문제 풀이 기술은 습득했지만 그것도 한창 써먹을 때나 유용하지 시간 지나면 다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보고 비록 경시는 안 했어도 그런 연구 활동 많이 하고 그거 바탕으로 대통령과학장학금도 타고 해서 내가 부럽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지원했을 당시 경시 실적이 아무리 좋아도 내신이 나쁘면 뽑아주지 않았다. 경시 실적은 있으나 내신은 개판친 아이들이 꽤 있었다. 나는 적당한 내신에 연구 성과가 많아서 뽑혔던 듯.)
학문을 대하는 자세와 조기교육?과학고를 단순히 또 하나의 입시 교육 기관으로만 보는 사람들에겐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학문을 대하는 것은 단순히 경시대회 문제를 잘 풀고 수능 시험을 잘 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아직 학부생 주제에 이런 것을 논할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지만, 학문을 공부한다는 것은 장기전이다. 더불어 순수한 지적 열망이 있지 않고서는 그 길을 계속할 수 없다. 솔직히 과학고 친구들 중에 정말로 공부 그 자체에 흥미를 느꼈던 아이들이 몇이나 있던가. 새로운 지식을 배웠을 때, 혹은 발견했을 때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다수의 아이들은 선행학습과 학원으로 인해 '만들어진' 학생들이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본인이 과학·공학에 뜻이 있고 좋아한다면 물론 문제가 없지만, 이른바 '공부 스타일'이 아닌데도 부모의 노력으로 과학고나 좋은 대학에 들어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행히, 주변의 카이스트 친구들 중에 이 정도의 심각한 상황은 없었던 것 같다. 학원·경시 출신이라도 카이스트에 있는 아이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 과학에 대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대학 진학에서 길이 갈라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본인이 실제로는 과학이나 공학에 큰 흥미가 없으면서도, 부모의 강요에 의해 시작하게 된 길이 (단지 약간 머리가 좋아서 쉽게 공부했다는 이유로) 마치 정말 자기가 가야 할 길인 것처럼 인식(착각)하고 있다면 불행한 일이다. 어찌어찌 대학원까지는 들어갈 지 모르나 박사과정 정도쯤에서 인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주변의 여러 경험담으로 보건대 박사과정에 들어가면 정말로 학문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지 않고서는 더이상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빨리, 더 이른 시기에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단지 무조건 학창시절 공부를 잘해야 하고, 유명한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 만으로 한 학생이 박사과정 쯤 되는 시기에 인생의 진로 고민을 하게 만들어버린다는 건 자기의 자녀에게 너무 미안한 일 아닐까?
학문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의사라든가 판사·변호사라든가--을 택하게 했다고 할지라도 professional의 수준에 들어가는 순간 결국 그 사람을 그 자리에 남게 하는 것은 열정과 의지, 그리고 진정 원하는가 하는 마음 뿐이다.
나도 사실 어떤 땐 가끔 정말 내가 학문을 하고 싶은 건지, 진정한 학자가 되기 위해 치뤄야 할 댓가들을 버텨낼 자신이 있는지 헷갈린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학문과 새로운 지식·경험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 자체가 즐겁다는 사실이다. (내가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또 다른 어려움이겠지만, 그걸 극복했을 때의 기분은 나만이 가진 멜로디를 찾아 피아노 악보를 옮겨 연주해볼 때의 기쁨과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나중에 학문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더라도 학문을 대하는 자세만큼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나마의 즐거움도 없었다면 소프트웨어공학개론 팀 프로젝트나 수리물리 같은 건 진작에 때려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걸 내가 왜 해 -_-
한편으로, 조기교육이 (극)소수의 아이들에겐 좋은 자극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정말로 그럴 만한 아이들을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름 포함해 보통의 경우, 어찌 됐건 자기 스스로의 고민 없이 누군가에 의해 주입되는 선행 지식이라는 건 사고의 융통성과 창의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대학에서 전산과 물리를 공부하면서 느끼는 거지만, 내가 정말로 스스로 곱씹어본 지식과 문제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입된 지식은 그 자체로서의 효력은 가져도 더이상 새로운 사고를 할 필요성을 없애버려 그 이상의 일을 하지 않게 만든다.
진정한 (선행) 학습고등학교 1학년 때, 지구과학 김혁 선생님이 선형 회귀 분석법에 대해 소개해주신 적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걸 설명만 듣고 넘어갔지만, '컴퓨터로도 구현할 수 있으니 한번 직접 짜볼 사람은 짜봐'라는 말 한 마디에 자극받은 나는 이틀 밤을 새서 그걸 직접 Visual Basic으로 구현했다. 영어로 된 인터넷 자료를 뒤져서 C 언어로 구현되어 있는 것을 이해하느라 머리 싸매고 몇 번을 뜯어고쳐가며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동작하는 것을 봤을 때의 그 희열!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지만 그때 배운 것과 실제적 개념이 계속 이어지고 이어져 선형대수의 기초를 넘어 이젠 여기 교환학생 와서 artificial neural network를 배울 때에도 기반을 이루었다.
이렇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단초를 제공받아 스스로 찾아나가는 것이 진정한 학습 아닐까? 불행히도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조기교육은 이러한 즐거움을 선사해주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원래 대학은 정말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이 들어가야 한다. 공부가 아니라 다른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대학에 안 가더라도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나갈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대학도 정말 보편교육화시켜버리고(여기 스웨덴처럼 대학원까지 무상교육을 실시한다든가..-_-) 분야별로 특화시켜 무조건 학자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의사·판사, 공무원을 목표로 삼는 것도 아닌 미용사, 요리사, 전문 엔지니어부터 정치가,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각각의 수요에 맞는 인재를 만들어낼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결론스웨덴의 여유로운 사회적 분위기를 보면서, 또 서양 아이들의 일상 생활과 실리적 사고를 보면서 한국 사회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조기교육 열풍이 그렇게 부는 것도 결국 한국 사회의 암담한 현실을 자녀가 잘 보다 쉽게 헤쳐나가게 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아무리 조기교육이 좋다 나쁘다 떠들어도 그 누가 자식 잘못되라고 조기교육시키겠는가.) 남들이 하면 다 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을 받는 뿌리깊은 문화적 특성과 짧은 기간 동안의 폭발적 경제 성장과 좁은 땅에서 아웅다웅 경쟁하며 살아야 하는 현실, 급속한 서양 문화의 유입과 이로 인한 가치관 혼란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뭐 구체적인 대안까지 제시하고 글을 마치면 더 좋겠지만, 나로서는,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특별히 조기교육 난리 굿을 치지 않아도 때되면 알아서 하게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공교육 교과과정만 제대로 따라가도 기초는 충분하다는 것. 학원은 문제 풀이 경험을 더 많이 해보고 싶거나 테크닉적 도움을 받고 싶을 때만 가면 되는 곳이라는 것. 정도가 내 생각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ps. 글이 너무 길어져서, 영어교육에 관한 문제는 나중에 따로 다뤄보도록 하겠다. 아마도 러시아 여행 다녀온 후가 될 듯?
ps2. 쓰기는 한참 전에 썼는데 글 손보려다가 이런저런 일(?)에 말려서 이제서야 포스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