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카이스트 9
- KAIST 영어강의? 20
Daybreakin Things
갑자기 드라마 카이스트에 말렸다. 1999년 무렵 SBS에서 방송했던 바로 그 카이스트 말이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재밌게 봤던 기억은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마침 학교 내의 어느 ftp 서버에서 81화 전체를 제공하고 있어서 찾아보게 되었다. (사실 입학 후 앞부분은 봤었지만 이번에 본격적으로 달리는 중이다-_-)
프로필에서 보면 알 수 있듯 나는 카이스트에 다니고 있다. (뭐 이 블로그 자주 오시는 분들이야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내가 수업을 듣고 시험을 쳤던 교실이 나오기도 하고, 당시에는 없었던 태울관, 정문술빌딩 등이 들어서기 전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또한 실제로 지금의 우리가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고민들을 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나, 드라마 치고는 꽤나 학교 내부 사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 등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나는 그 동아리에서 모델이 되었던 바로 그 미스터(MR) 동아리원이고, 또한 전산과이기도 하다. 게다가 90년대에 있었던 포항공대-카이스트 해킹사건의 전설적 인물인 노정석님과 아는 사이이기도 하다. 내가 그 드라마를 처음 봤던 초등학교 6학년 때만 해도 내가 카이스트에 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막연하게 '멋지다'라고 생각만 했던 것 같다. 그러던 내가 어느새 그 카이스트 한가운데 서 있고, 벌써 4년 중 2년이 지나간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그런만큼 이 드라마가 단순 재미뿐만 아니라 여러가지로 새롭게 다가온다.
해킹에 관한 이야기가 드라마 전반에 걸쳐 몇 차례 나오는데, 당시에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는 너무나 당연하게 쓰고 있는 것들이라는 것도 재밌었다. 쉘 프롬프트(드라마는 BSD 계열로 나온 것 같다), ls 명령, sendmail 프로그램, 포트 스캐닝 등... 게다가 '박 교수'가 가르치는 수업에서 Mas heap 등이 나온다는 것은 바로 Data Structure 수업임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시간복잡도 얘기까지 나오다니...ㅠㅠ 드라마에서 수업 시간에 교수가 던진 질문이 실제로 내가 들은 DS의 기말고사 시험 문제기도 했다.)
물론 드라마이니만큼(?) 허구도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기숙사 방. -_- 신축기숙사는 그래도 꽤 깨끗한 편이지만 드라마는 무슨 기숙사 방이 아니고 거실이다. 방에 탁자를 놓고 앉아서 얘기할 공간 씩이나 있다니. (...) 학부도서관의 계단 위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더니 갑자기 보이는 석학의 집 간판도 매우 황당했다. 실제 석학의 집은 그와 1km 정도 떨어진 서측학생회관에 있다. -_-; 박 교수가 DS 수업을 하는 교실은 사실 전산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다. 정확히는 내가 인지과학입문과 심리학개론을 들었던 곳이다. (당시에는 창의학습관이 없었으니 인문사회과학부 쪽에서 일부 전공 수업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MR는 로봇축구보다는 보다 다양한 로봇들을 연구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2004년 이후로는 이렇다 할 만한 대회에 출전하거나 하지는 않고 있지만, 벽에 박힌 못들에 팔을 뻗어 기어오르는 로봇 같은 것도 만들고, 이족 보행 로봇 등을 다루기도 한다. 요즘은 그때보다 로봇 산업 자체가 굉장히 커지고 기술도 많이 발전해서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나 같은 경우는 MR 후배 한 녀석과 함께 URP[footnote]학부생 연구 참여 프로그램. http://urp.kaist.ac.kr[/footnote]로 수중로봇 개발을 하고 있는데, 정말로 잘 만들어진 각종 컨트롤/임베디드 보드나 시뮬레이터 등이 많다. 그래서인지 드라마에서와 같은 '극적인' 요소는 다소 줄어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드라마에서 다가왔던 것들은 그것이 담고 있는 줄거리였다. 기업의 스폰서를 따내기 위한 교수와 학생들의 눈물겨운 노력, 로봇축구를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육성하는 일본과 우리나라의 차이, 유학을 가느냐 마느냐 하는 갈림길에 선 연인, 겉으로는 엄격하고 까탈스럽지만 속으로는 진정 학생을 위하는 교수(..) 등 일부는 살짝 과장된 면도 없지 않지만 실제로 매우 공감가는 이야기들이다. (물론 요즘은 그 정도로 연구비가 모자라서 고생하는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드라마의 배경은 IMF였으니까.) 그 속에서 엮어지는 주인공들의 고민과 일상, 대사들은 가끔씩 지금의 나에게 새로운 자극이 되어주고 있다. 과학·공학을 왜 공부하는가?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 것인가? 하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들을 간접적으로 던지고 있는 것이다.
카이스트 학생으로서 보는 드라마 카이스트는 정말 느낌이 색다르다. 남의 이야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일상에서 겪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요즘 나오는 다른 드라마들처럼 현실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 기형적인 가족 구조, 숨겨진 비밀, 불치병 등으로 신파 떨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살아가는 공간과 현실에서, 실제 주변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인물들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년인가, KBS였던가, 카이스트를 소재로 다시 드라마를 만든다면서 몇 차례 작가와 PD 등이 몇몇 동아리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 별다른 이야기가 없는 걸 보니 아마 취소된 모양이다. (혹시 아시는 분은 댓글 부탁) 만든다고 해도, 그 드라마 카이스트처럼 큰 공감대를 형성하고 신선한 느낌은 주기 어려울 것 같다. 지금 보면 다소 유치한 면은 보여도 이공계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을 바탕으로 했다는 건 뚜렷이 느낄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당시보다 더욱 복잡해진 현재 상황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