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breakin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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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살아가기, 생각하기
드디어 3박 4일간의 꽃동네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볼까 합니다. (KAIST 신입생 600명을 약 90명씩 7개조로 나누어 12월 27일부터 1월 말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약간의 간격을 두어 진행됩니다)

이번 꽃동네 봉사활동은 7일에 출발하여 오늘(10일) 오후에 돌아왔다. 갈때는 KAIST 태울관에 집합하여 간단한 주의사항을 듣고 단체 버스로 갔고 올 때는 사랑의 연수원 교육관 앞에 모여 KAIST와 서울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 중 후자를 타고 양재역 - 1550번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갔던 아이들 중엔 그다지 '보람'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 같은 경우는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3조였기 때문에 이전 조 아이들이 어디어디로 가는 게 덜 힘들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있어 몇몇 아이들은 미리 어디로 자원해야지 하고 결정한 경우도 있었는데, 교묘하게도(?) 수녀님이 교육관에 모였을 때 앉은 자리(대부분 아는 사람들끼리 가로로 같이 앉았음)대로 하지 않고 세로로 쭉 번호를 부르게 하여 마음대로 배정해 버렸다. 사실 나는 원래 희망의 집이 될 뻔 했는데, 나 대신 친구 재덕이가 번호를 불러야 할 차례에 번호를 불러(-_-) 천사의 집이 되었다.

천사의 집은 주로 미혼모에게 난 신생아부터 유아 단계의 아이들을 키우는 곳인데, 그곳에 같이 배정받은 4명의 친구들(인천과학고 김용후, 제주과학고 김대건, 서울과학고 김형선, 조용운 - 원래 다른 조였던 아이들도 있음)과 1층 관리실의 수녀님한테 갔더니 4층은 신생아, 2층은 유아들이 있고, 3층엔 16세부터 65세 미만의 다양한 연령층의 남자들(?)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1층 주방엔 2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알아서 의논해 결정하라는 말에 나는 중학교 때 주방을 했었으므로 다른 걸 하기로 했고 4층은 용후가 2층은 용운이가, 주방은 형선과 대건이가 맡았고 내가 3층이 되었다.

각자 배정받은 곳으로 흩어지고 3층에 홀로 딱 들어서니 웬 키큰 아이(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가 비틀거리며(장애임) 걸어오더니 나를 딱 잡고서 사무실(각 층별로 봉사자들이나 수녀님이 의무, 사무 등의 업무를 보는 방이 따로 있다)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이름은 아직도 모르는) 한 직원분(수사님?)의 생각보다 긴(?) 연설을 듣고(주 골자는 이 분들은 호적도 없는 사람들인데 호적을 만들면 법적으로 어떻게 어떻게 해서 오히려 이 시설에 데리고 있을 수 없는데 그런 건 고쳐져야 한다면서 내가 KAIST에서 왔다고 하자 미래에 유명한 사람이 될 사람들이 그런 걸 고치게끔 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내가 오후 늦은 시간에 시작했기 때문에 그다지 할 일은 없었다. 보니 내 또래의 다른 봉사 학생들이 있어 이야기를 나눠보니 한 명은 나보다 1살이 많고 나머지 둘은 동갑이었다. 나이 많은 여학생은 이름이 미수라고 했는데 꽃동네에 여러 번 와서 경험이 많고 이곳 가족들도 잘 안다고 했고, 동갑인 여학생은 성이 라씨, 이름이 꽃님(-_-)이라고 했는데 4번 정도 여기로 왔다고 한다. (생긴 건 꽃님처럼 예쁘진 않지만 착한 사람인 듯..) 또 동갑인 남학생은 박두선이라고 했다. (이곳이 충북 음성이었는데 제천이나 충주 쪽에 사는 모양으로 꽃동네 셔틀버스를 타고 다니는 듯 했다) 라꽃님은 주로 '라꽃'이라고 불렸는데 처음에 통성명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나는 어디서(학교) 왔는지만 알려주어 결국 3일째 저녁 때까지 계속 날 '카이스트'라고 불렀다. -_-;;

첫번째로 생긴 할일은 밥을 먹이고 양치를 시켜 주는 것이었다. 난 전에 주방일만 해 봤고 실제 장애인들을 대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라 버벅거렸지만 다행히 이곳에 계신 직원분들이 잘 알려주셨다. (준호는 자기가 '상식'이라고 이름붙인 한 수사님이 계속 잔소리만 하고 일을 알려주지 않아 고생했었다고 한다) 밥을 떠 먹이는 것도 생각보다 쉽지 않았는데 일단 이분들이 장애인이다 보니 의사소통 자체가 잘 안 되는 점이 어려웠다. 보통은 먹어서 목으로 넘기고 나면 입을 벌려 또 넣어 달라고 하는데 어떤 분들은 그 행동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 언제 입에다 숟가락을 갖다 대야 할지 알아채기 힘들었다. 그리고 입에 음식이 들어가더라도 사람에 따라서는 질질 흘리는 경우가 많아 밑에 꼭 턱받침을 받쳐 놓고 해야 했다. 나는 비위가 강한 편이라 이런 게 더럽게 느껴지거나 하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끝나고 양치도 하는데 먹이는 것 보다 더 어려웠다. (대신에 먹이는 건 오래 걸린다) 특히 홍선이라고 불리는 한 소문난(?) 개구쟁이 꼬마 녀석(몸도 행동도 유치원생같지만 실제 나이는 17세이다)은 양치를 싫어해서 억지로 온몸을 붙잡은 채로 입을 강제로 벌려 닦아야 했는데 그나마 칫솔을 겨우 입에 넣어 닦아주려고 하면 칫솔을 꽉 물어버려서(-_-) 닦기가 매우 곤란했다. 여기서는 먼저 장애인들을 먹이고 양치까지 해 준 다음 봉사자들이 식사를 하게 되어 있어 그 아이까지 해 주고 나서야 밥 먹을 수 있었다. (저녁땐 내가 밥까지 먹고 하면 특별히 할 일 없이 있다가 대충 시간 되면 숙소로 간다)

다음날 새벽 5시에 일어나 대충 세수 및 양치를 하고(이미 단체로 공동 세면장에서 이런 일 하는 건 2년간의 기숙사 생활에서 익숙해진 것이었다), 매서운 새벽 추위(우리가 꽃동네에 있던 그 기간이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추위 기간이었다)를 뚫고 천사에 집엘 갔다. 다른 4명의 아이들과 함께 갔는데 이곳은 산골이라 그런지 정말로 별이 잘 보였다. 이때는 새벽이라 안 보였지만 저녁때 돌아올 땐 오리온 자리의 오리온 성운까지(명확하지는 않지만) 맨눈으로 어느정도 구분이 될 정도였다.

그렇게 둘째날도 아침식사(먹이기+양치시키기+밥먹기)로 시작했다. (참고로 이곳의 식사 시간은 가족들 기준으로 아침 6시 30분, 아침 11시 45분, 오후 4시 45분으로, 보통 사람들의 일상보다 빠르고 대신 7시쯤 일찍 잔다) 내가 있던 3층은 '일반방', '주방'(층별로도 주방이 있어 1층 주방에서 만든 음식들을 배분하고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식판 설거지를 하는데 여기 봉사자는 층별로 배정된 사람 중 정한다), '침대방'이 있는데, 이중 침대방은 일반방에 있는 사람들 중 병/장애가 심한 중환자들을 병상에 데리고 따로 관리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침대방의 사람들은 목욕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_-; 먼저 병상에서 목욕용 침대(골격하고 젖지 않는 간이 매트리스만 있는 것)로 옮긴 다음 공동 세면장에 데려가 직원분들이 샤워를 시키고, 나는 샤워하고 나온 가족들을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침대방으로 옮기는 일을 하였다. 덤으로 그러면서 옷도 갈아입히고 침대 매트리스도 세탁하였다. (이건 다른 봉사자들이 했다)

침대방에 있는 분들은 아까 말했듯 중환자인데 처음에는 다 이불을 덮고 있어 잘 몰랐지만 목욕시키고 나서 수건으로 몸을 닦아 줄 때 보니 정말 내가 그동안 말로만 들어본 모든 기형/불구는 다 있었다. 하반신 마비는 기본(-_-.. 똥오줌을 가릴 수 없기 때문에 고추(거시기)에 긴 비닐봉지로 관을 만들어 오줌을 모아 정기적으로 버린다)이고 다리가 뒤틀려 있거나 지체 장애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정신도 오락가락하는 사람들도 있어 샤워 중 돼지 멱따는 소리(-_-)가 간간히 들렸다. 게다가 이들은 꽃동네에 오기 전 방치되어 있었거나 적절한 치료를 못 받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피부에 욕창 등 온갖 피부병과 상처가 있었고 고름 냄새 같은 것도 심하게 났다. (사연을 들어보니 소달구지로 밭을 갈다가 소가 날뛰어 달구지에 깔린 사람, 열차 사고로 장애가 된 사람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몸 구석구석 물기를 닦아 주고 싶어도 뒤틀려 있는 몸이 펴지지 않아(굉장히 단단하게 굳어 있어 두 사람이 같이 억지로 벌려도 잘 안 벌어질 정도다) 고생했다. 이때는 진짜 비위가 강했으니 망정이지 여자들이나 비위 약한 사람들은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족분들 자체는 어차피 신경을 쓸 수 없거나 모르기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성인 남자의 알몸을 보는 것도 그럴 것이다)

그렇게 두 시간여 동안 목욕을 시키고, 방 청소 간단히 하고 점심식사를 하였다. 오후에는 3시 30분 특전미사(가족들이 직접 성당에 갈 수 없어 신부님과 수녀님이 직접 돌아다니시며 미사를 해 주신다)가 있었고 그 외의 특별한 일은 없었다. 이때부터 좀 말을 잘 하시는 분들과는 익숙해져서 물 떠오기나 화장실 가는 것 도와드리기 정도는 간간이 해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저녁식사까지 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것으로 둘째날 일과는 끝났다. 사실 둘째날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안 되어 그쪽 직원분들이 말하는 '고차원적 봉사'를 할 수 없었다. 그분들이 말하는 '고차원적인 봉사'란 청소나 밥 먹여드리기 등의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정말 마음을 열 수 있게 도와주고 사랑과 정을 나누는 것이다. 사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오질 않아 할일이 없어 쉴 때는 라꽃과 잡담하거나 뻘쭘(-_-)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셋째날(일요일)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다른 4명의 친구들과 두선이와 같이 숙소를 나섰다. 이번에는 꼭 '고차원적 봉사'를 하리라 다짐하고. 일상처럼 아침식사를 하였고 특별한 일이 없어 가족들을 죽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혼자 구석탱이에 처박혀 손으로 문고리같은 걸 계속 만지작만지작 거리며 '폐인짓'을 하고 있는 한 아저씨가 눈에 띄었다. (다리를 전혀 쓸 수 없어 손으로 기어다니시는 분으로, 나중에 알아보니 이름은 '허 욱'이라고 하고 똥오줌을 못 가려 가족들이 신문지로 깔아놓고 대충 보살폈었으며 여기 온 지 약 두달 반 정도 됐는데 적응을 잘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보름 동안 훈련시켜 겨우 화장실을 혼자 가게끔 만들었다고 한다) 말은 알아듣는 분이었으므로 그 아저씨한테 가서 왜 그러고 있냐고 물었더니 힐끔 쳐다보고는 대답을 안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자꾸 손으로 뭔가를 만지작거린다는 점에 착안하여 내 손을 대신 만지작거리라는 뜻으로 다른 한 손을 잡고 여러가지 손동작으로 만져 주었다. 처음에는 뚱 하게 별 관심이 없다가 한 30분쯤 계속하니까 날 쳐다보며 씩 웃는 것이었다. 그러자 나는 만지작거리던 손도 같이 잡아주고 서로 온기를 교환했다. 그랬더니 점점 더 좋아하면서 아예 내 무릎을 베고 잠을 청하는 것이다. 마침 지나가던 직원분이 내게 '바로 그렇게 하는 거야'라고 속삭여 주었다. ^^; 그 후로 그 아저씨는 내가 일이 없어 한가해질 때마다 엉금엉금 날 쫓아와서 아빠다리 하고 앉은 내 허벅지를 베고 자려고 했다.

이렇게 드디어 이 사람들과 교감이 시작된 것이다. 다른 몇 분들한테도 시도해 보니 따뜻하게 손을 잡고 간단한 손장난을 쳐 주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것 같았다. (말이 통하는 분이든 안 통하는 분이든) 나는 이때 처음 알았다. 서로 손을 맞잡는 것이 단순한 온기 교환을 뛰어넘어 그렇게 큰 정 교환이 될 수 있는 것을.

넷째날(오늘, 월요일)은 전처럼 아침식사를 끝냈다. 유치원생~초등학생 같은 (몸도 행동도) 아이가 한 명 또 있는데 이름은 태현이다. 그 아이는 내가 밥 먹여주고 양치해 주는 걸 유난히 좋아해서(왜 그런진 모르겠다. 내가 특별히 잘 하는 것도 아닌데...) 다른 봉사자가 해 주고 있더라도 내가 지나가면 나더러 해달라고 그런다. 이렇게 날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 나도 기뻐하고 있었는데, 전날의 욱이 아저씨가 내 허벅지를 베고 자고 있는 걸 홍선이가 반대편 허벅지를 베고 자려고 했다. 물론 장난꾸러기 그 녀석이 그 아저씨한테 괜히 건드리며 시비를 걸었고, 그 아저씨도 마치 '내'가 '자기 것'인양 저리 가라고 하면서 애를 꼬집었다. 결국 둘이서 내 허벅지를 벤 채 싸웠는데 거기에 날 층 사무실로 데려다 준 그 아이가 쭉 편 내 다리의 정강이에 누우려 했고 아저씨는 그 아이도 쫓아내려고 했다. 업친 데 덮친 격으로 22살 정도 되는 중학생 같은 형이 있었는데(말도 알아듣고 머리도 좋다고 하는데 발음이 매우 부정확하여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어렵다) 그 형이 내 옆구리를 베자(셋이서 싸울 때 나는 이미 말리다가 gg치고 벌렁 누워있었다) 이번엔 넷이서 실갱이를 벌였다. 그렇게 한동안 싸우며 다른 봉사자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는데, 문제의 홍선이가 내 급소(!)를 실수인지 고의인지 아무튼 꼬집어 버린 것이다. 결국 난 비명(-_-;;)을 질렀고 다른 봉사자들은 웃었다. (젠장..) 그러더니 일어나며 돌아댕기다가 자리에 앉는다고 팔로 바닥을 짚는다는 것이 그곳을 다시 한번 눌러(-_-;;;;) '윽'...;; (녀석 몸무게가 가벼웠기에 망정이다) 약간 아프긴 했지만 아무튼 그만큼 가족들이 날 좋아한다는 것이 기뻤다.

점심식사 후 헤어질 시간이 되었고, 태현이는 나더러 가지 말라고 그랬고 욱이 아저씨는 서운한 티를 내며 내 허벅지를 베지 않았다. 태현이는 몸 전체를 가눌 수 없어 항상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데(덕분에 나도 그 사용법을 익혔다) 태현이와 김찬성(또다른 어려 보이는 아이가 있음)이가 물리치료를 받으러 간다고 먼저 떠나 작별 인사를 했다. 떠날 때 인사를 하니 토마스 수사님도 싸이월드 주소(-_-)를 알려주며 잘 가라고 했다. (이 수사님은 2조였던 근우도 봉사를 잘 했다며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꽃동네를 떠나 왔다. 나는 이 사람들한테 기본적으로 해 줘야 할 것을 해 주면서 약간의 정을 더 얹어 주었을 뿐인데 그 사람들은 그 정을 정확히 n배로 늘려서(-_-....) 되갚는 것 같다. 바로 봉사활동의 참맛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 약해져서인지 다음 번에도 천사의 집 3층은 꼭 다시 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서로 욕하며 싸우기도 하고 먹을 것에 집착을 보이기도 하지만 정말 단순하고 순수한 사람들이었다. 처음에 교육관에서 수녀님이 하신 말씀 중 '사랑도 배워야 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ps. 강성훈(토끼군)이 성모송("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 예수님이 ~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빌어 주소서")을 하도 많이 해서 듣다보니 외웠다고 했는데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보통 미사 전에 묵주기도를 바치는데 꽃동네의 경우는 묵주기도 전체를 다 했으니 한 미사에 최소 52번은 들었을 것이고, 저녁 식사 후 매번 삼종기도를 하니 또 매일매일 3번은 들었을 것인 데다 성훈이가 있던 기간은 주말에 1월 1일 성모승천대축일(신년미사가 아님) 미사까지 끼어 대략 백 수십번은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ps2. [조언] 꽃동네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 처음 가는 사람들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버벅댈 수 있는데(예를 들어 양치를 해 준다든지), 용기있게 '눈 딱 감고' 하면 된다. 거기 있는 직원분들도 봉사자들이 못할 만한 일을 시키기지는 않는다.

ps3. 저녁 7~9시는 희망의 집 2층 홀(숙소임)에서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때 주로 장기를 두었는데 2층에 사는 대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지체 장애인 형이 있는데(대부분 휠체어를 타고 다님) 정말로 장기를 잘 둔다. 아무도 이길 수 없었다. 특히 어떤 판에서는 오로지 상대방의 포와 졸 하나씩만을 먹고 판을 끝내버렸다. (어떻게 하든지 장이 걸리는 것이다. 어떻게 두알밖에 안 먹고 끝나는지) 그러더니 그 다음판은 엘리전.. 결국 그 판을 두던 아이는 gg쳐 버렸다. -_-;

ps4. 토끼군에 이은 꽃동네의 미스테리 시리즈.
1. 희망의 집 2층 공동세면장에 온수와 냉수 수도꼭지 색이 바뀐 것이 있다.
2. 천사의 집 3층 사무실에 있는 화이트보드를 잘 보라. 맞춤법도 그렇지만 실제 거기 쓰여 있는 목욕/진료 일정 등과 실제는 하나도 맞지 않는 것 같다. -_-;
3. 가족들 중 유난히 성이 '오'씨인 사람이 많았는데, 물어보진 않았지만 내 추측으로는 이름을 대라고 했을 때 이름만 말하고 성을 말하지 않아 임의로 '오'로 통일한 것 같다. (심지어 기록상의 이름이 '오울보'인 사람도 있었다. - 하긴 봉사자 중에 '라꽃님'도 있는데.. (응?) )

ps5. 대건이와는 대화를 별로 안 해서 잘 몰랐는데 끝날 때 1시 30분에 모여서 같이 교육관으로 가기로 하고 용운이를 기다리는데 '용운?? 말????(용운이한테도 말했어?)" 이란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제주도 사투리를 쓴 듯하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같이 주방에 있었던 형선이가 통역해 주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