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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사회운동가로서 인간 예수가 당대의(그리고 현재의) 정치적·경제적(자본주의) 틀과 다른, 모든 인간이 기본적인 품위를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을 지향하고 그것이 영광의 길이 아니라 수난의 길이었음을 보여주는 책. 열두 제자들이 기대한 것과 예수님의 지향점 차이로 인한 갈등을 사회개혁(변혁?)운동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하지만 너무나 강하고 확실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때문에, 이 책을 쓴 김규항씨 본인조차 그러한 삶을 살 것인가, 살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부활의 과학적 신빙성이 예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예수가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사회에 잘 '적응'한 인텔리나 중산층들이 어떻게 보면 지배체제의 독식을 더욱 공고히 하는 (스스로 원하든 원치 않든) 보수성을 띰을 나타낸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두가 '잘' 사는 이상향을 좇기보다 자신과 가족의 안위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음'을 주장하는데 김듀항은 그것에서 벗어나야 예수님이 전파한 가치를 따라 살게 됨을 역설한다.)
메마르고 품위 없이 사는 사람들을 사회에서는 교양없는 사람들로 간주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실은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악다구니를 쓰지 않아도 되고 폭력의 현장에서 한발치 떨어져있을 수 있기에 그리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이 예수가 지적한 위선이자 그가 로마와만 대립한 것이 아니라 유대민족의 바리사이들이나 기득권층과도 대립했던 이유라는 것이다.
나 자신 또한 한국에서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나의 순수함과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들을 큰 어려움 없이 추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내가 만약 그럴 수 없는 환경에서 태어났다면—그것이 신의 뜻이라 해도—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든다. 또한 고등교육을 받고 유대감 넘치는 집에서 행복하게 살아온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가치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의무감도 들었다.
처음엔 김규항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책만 재밌게 봤는데, 중간쯤 읽다가 저자 프로필을 보니 전형적인 좌파적 성향을 가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와 같은 사회운동을 해야 한다고 보다 강하게 주장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문제는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그 사람 본인이 그런가 하는 점.) 흔히들 그런 사람들을 두고 반골의 성향이 있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무엇이 옳고 옳지 않은가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여태껏 인류가 겪어왔던 모든 사회 체제는 부조리한 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어쨌든 이 책을 보면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를 바라보면 예수가 당시 기존의 정치적·경제적 개념과 사회적 관습과는 완전히 다른 파격을 추구했음을, 예수가 지배체제로부터 사형 당한 이유를 보다 투명하게 바라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비록 그가 자신이 주장하는(?) 삶대로 살고 있지는 못할지도 모르지만 자기라도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글을 쓴 것이 아닌가 싶었다.
엊그제 룸메이트가 소개해준 일본 SF애니메이션 '프리덤'을 보았다. 지구가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인류는 달에 인공도시를 짓고 거주하게 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지구가 푸르게 회복되고 살아남은 인류가 있음에도 도시의 운영자들은 시민들에게 그 사실을 숨기고 진실을 알려는 자들을 죽이거나 가둔다. 여기서 그 운영자들은 달에 도시를 만들 정도의 과학기술로 인해 지구를 잃어버릴 뻔했던 만큼, 시민들(인간들)이 다시 과학기술의 힘이 주어져도 평화롭게 살 것이라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노라 주장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일견 그들의 주장이 이해되고 거기에 반기를 드는 젊은 주인공들이 '너무 어려서' 인간에 대한 지나칠지도 모르는 희망을 갖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지구와 다시 왕래가 이루어졌을 때, 달의 도시가 더 이상 그곳의 인류에게 전부가 아니게 되었을 때 잃어버릴 수 있는 기득권 때문에 지배체제로서의 저항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그 애니에서는 그런 논리를 일부러 숨겨서 진부한 논리적 흐름을 탈피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학부식당에 있는 카페베네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좀전에 근처 자리에 앉았던 어떤 여학생 둘의 대화가 생각난다. 한 명이 부모님과 전화하면서 마구 투정을 부리니까 다른 학생이 왜 그런지 물어보았다. 아버지 직장 이동 때문에 5명이 사는 90평짜리 집이 55평짜리 집으로 이사가게 되었는데 방이 너무 작아져서 싫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제시한 대안은 집 2개를 사서 터서 쓰자는 것인듯 했는데 그래봤자 방 크기는 똑같지 않냐는 것. 물어본 친구는 벙 쪄서 4인가족 기준이면 28평에서도 사는데 뭐 그걸 가지고 불평하냐는 볼멘소리를 했다.
이렇게 우리가 사는 삶의 경제적 수준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친구들 중에 돈이 많은 사람도 있고 별로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단순히 돈이 많고 적음은 문제가 아닌데, 그로 인해 인간의 가치 평가도 함께 변한다는 것이 문제다. 예수가 부자더러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 것은 그런 뜻에서일 것이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과 별개로, 이 책을 통해 예수님이 단순히 사랑의 교리만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인류가 대대손손 사회구조에 대해 왜, 어떻게 고민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잃어버리기 힘들 정도의 강력한 방식으로 남겼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쩌면, 내가 한때 무신론을 지지했을 때 바라보고 싶었던 예수의 모습이 이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어쨌든 그가 남겨준 정신적 유산은 실로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