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breakin Things
그저께 고등학교 동기 친구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대안언어축제 및 P-CAMP를 2박3일 동안 마치고 돌아와 성당 다녀온 다음 저녁 먹으려던 찰나에 연락받았다. 가족·친척 빼고 태어나서 처음 가는 조문이었다. (사실 아주 어렸을 때 할머니 돌아가신 거 말고는 장례에 가본 적이 없다.) 대안언어축제 마지막날 거의 밤새고 그 전날도 잠을 설치고 그랬던 터라 매우 피곤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안 가볼 수는 없었고, 또한 경기과학고 21기 아이들도 많이 올라오고 있다고 하니 얼굴도 볼 겸 가게 되었다.
빈소에 조문하러 가면 나는 전체적으로 아주 엄숙한 분위기일 거라 생각했지만 일단 영정에 절하고 상주와 맞절하는 순서를 마치면 방문한 사람들끼리 앉아 음식 대접을 받으며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그런 거였다. 누구 말로는 초상으로 인한 허함을 달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떠듬으로써 그 빈 공간을 채우고자 하는 일종의 문화라고 하였다.
언젠가 나도 나이먹고 친구들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초상집에 조문하러 다니겠지 하는 생각은 막연히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예상보다 일찍 찾아왔다. 듣기로는 며칠 전에 쓰러지셨다가 그날 새벽에 돌아가신 거라고 한다. 대안언어축제를 통해 현업에 계시는 분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와 회포를 풀며 삶에 대한 에너지를 얻었지만 또 이렇게 죽음과 남은 자들의 공허함을 대면해야만 했다. 사실 우리는 삶의 모습만을 보지만 언제나 그 이면에는 죽음들도 함께하고 있는 법이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 또한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세포들이 태어나고 죽으면서 우리 몸을 유지해주기 때문이리라.
어쩌다보니 이날 조문은 졸업 후 경기과학고 21기의 가장 큰 모임이 되어버렸다. 해외에 나간 친구들과 서너명 정도 연락이 제대로 안 된 녀석들 및 일정 때문에 다음날 방문하기로 한 친구 두세명 빼고 나머지는 거의 다 온 것 같다. 학기 중 일요일이라 카이스트 다니는 아이들은 기차타고 내려가다가, 혹은 도착해서 연락받고 도로 올라오기도 했다. 대부분 학사과정의 끝에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이 모임이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석사 진학한다는 친구도 있고, 의대나 한의대에 진학해서 본과 생활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이들도 있고--해부 실습할 때 쓰는 포르말린 용액 때문에 그 독성으로 얼굴에 여드름이 도진 친구도 있었다--아직은 대부분 학생이지만 앞으로 5년, 10년 지나면 어떤 모습들로 변해있을까. 한의대 간 한 친구는 자기가 공짜로 침 놔줄 테니 허리 아프면 찾아오라는 소리도 했다.
나는 지난 학기에 교환학생을 다녀왔고 이번 학기 휴학 중이었기 때문에 다들 소식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런저런 프로젝트들도 하고 있고, 책 쓰는 일도 하고 있다고 하니 몇몇은 흥미있어하는 눈치였다. 대부분 학업을 하며 앞으로 계속 달려나가고 있지만 나는 한 템포 늦추면서 대신 다른 경험을 쌓는 중인 셈. 고등학교 때만 해도 경시 입상하는 것 외에는 주변의 것을 별로 보지 못했던 친구들은 대학생활을 하고 나니 '그 외의 다른 것들'에 대해 느끼는 점들이 있는 것 같았다. 침 놔준다던 친구는 오히려 날 부러워하기도 했다.
남들이 선망하는 의대, 한의대에 진학한 친구들이었지만 자기가 진정 원하는 일을 찾아 하는 친구들을 보고 내심 부러워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물론 자기가 원해서 간 친구들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사실 나도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일인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지만, 그래도 일단 하면 즐겁고 성취감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학부 전공은 마무리했지만 앞으로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직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는 것. 사실 과학고 정도 되는 학생들에겐 공부를 잘 하는 것보다 삶의 진로 선택이 더욱 중요한 것 아닐까 싶다. 방향만 정해진다면 그걸 향해 달려나가는 것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친구들이니까. 하지만 동시에 잘못 방향을 잡는다면 더욱 큰 상처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친구들을 다시 몇 년 후에 보게 되면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고등학교 졸업 후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경험했는지 생각해보면 앞으로는 또 어떤 흥미진진한 일들이 펼쳐질지 궁금하다. 언제까지나 순수한 고등학생처럼 남아있을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