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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조건 영어로 먼저 입력하게 하는가.에 대한 반론글.

IME1는 기본적으로 운영체제에 종속된 기술이고 그 상태 전환은 온전히 사용자에게 달려있다. 비밀번호 입력란이나 단축키를 사용하는 게임을 즐길 때와 같이 특수한 상황에서는 보통 해당 소프트웨어나 운영체제 스스로 IME를 꺼서 무조건 ASCII 영문으로만 입력하게 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런 경우 아예 애초부터 한글 등의 비ASCII 문자가 입력될 필요가 없고 입력되었을 때 사후 처리가 곤란해질 수 있는 경우(특히 비밀번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색어, 이름, 댓글 입력란처럼 한글과 영문이 모두 사용될 수 있는 곳은 사용자가 선택한 IME 상태를 그대로 존중해주는 것이 원칙이다.

또한 IME 환경은 한중일과 같이 복잡한 입력기가 필요한 동아시아 문화권뿐만 아니라 유럽권에서도 자체 키보드 배열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PC의 de facto standard인 미국식 영문 자판과 유럽식 키배열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베트남과 같이 윈도우가 제공하는 입력기가 아닌 자체적으로 개발한 입력기 프로그램을 붙여 쓰는 경우도 있는 등 각 사용자마다 그 환경이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

분명한 건, 일반적으로 웹페이지에서는 비밀번호 입력이 아니라면 IME 상태를 변경하지 말아야 한다. 일반적인 GUI 환경의 프로그램들은 이러한 텍스트 입력란에서 사용자의 명시적 행동 없이 IME 상태 변경을 하지 않고 있는데, 웹브라우저의 Form 요소를 사용할 때도 당연히 이러한 전제를 무의식적으로 깔고 사용하게 마련이다. 이럴 때 자기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나타나면 사용자 입장에서는 불쾌함을 느낄 수 있다.

물론 한글 사용을 장려하자는 기본적인 취지는 좋지만(필자도 세벌식을 쓰는 등 나름대로 컴퓨터 환경에서 어떻게 하면 더 한글을 '잘' 쓸 수 있을지 많은 생각을 해왔고, 한글 입력을 지원하지 않는 게임인 Supreme Commander에서 멀티플레이 중 한글 채팅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한글입력기 플러그인을 만들고, PuTTY의 개선 버전인 dPuTTY를 통해 한글 IME 관련 동작을 개선하는 등의 노력을 한 바 있다.), 보다 큰 시야에서 기술을 바라보는 관점이 아쉽다. 생명복제 기술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남용하면 안 되듯이, 일부 운영체제·웹브라우저 환경에서 IME 상태 변경을 지원한다고 해서 그것을 필요 이상으로 남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얼마 전, 모 서비스 가입을 할 때도 비슷한 것을 느꼈었다.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하기 위해 3칸으로 나누어진 텍스트 입력상자들이 있었는데, 내 휴대전화 번호가 xxx-yyyy-zzzz와 같이 3-4-4자리였고 나는 당연히 xxx 입력 -> 탭 -> yyyy 입력 -> 탭 -> zzzz 입력 이런 식으로 하려고 했다. 우선 첫 번째 문제는 xxx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다음 입력칸으로 넘어가는 스크립트가 들어있어 yyyy를 zzzz 입력해야 할 칸에 입력하게 되었다는 것이 문제였고, 그 다음은 두 번째 칸에 yyyy를 입력하는데 3글자를 넣으니 자동으로 다음 칸으로 넘어가버려서 매우 당황했었다는 것이다. 알고보니 yyyyzzzz 순서대로 다 치고 나면 yyy-yzzzz로 입력되었다가 스크립트가 알아서 두번째 칸에 4자리를 넣어주는 방식이었는데 매우 불쾌한 경험이었다.

나를 기분나쁘게 한 사실은 다음 입력칸으로 이동하는 데 사용하는 탭키의 사용을 내 동의 없이 마음대로 가로챘다는 것과, 어차피 서버에서 받을 때 validation해야 하는 부분을 굳이 웹페이지 자체에서 올바른 형태로 보여지게 만들려고 사용자의 예상을 깨는 동작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그 가입 페이지를 만든 사람은 사용자들이 탭을 누를 필요가 없고 자동으로 양식을 맞춰주니까 더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 물론 일부 사용자들은 이런 자동화된 방식을 더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User Interface 설계는 사용자의 예상을 최대한 깨지 않는 방향이 올바른 접근이다. 또한 모든, 혹은 거의 대부분의 웹사이트나 프로그램에서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할 때 위와 동일한 동작을 보인다면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사용자의 선택에 두는 경우가 많고(특히 해외사이트들은 거의 다 그렇다), 이런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사용자에게는 일관성을 깨뜨리는 것이 된다.

같은 관점에서, 한글 입력을 장려한답시고 웹페이지의 IME 상태를 강제로 바꾸는 일은 사용자가 원래 사용하던 패턴을 깨는 매우 나쁜 UI 설계이다. 게다가 이 방식은 모든 운영체제와 웹브라우저에서 동작하는 것도 아니어서 일관성 원칙 또한 깨뜨린다. 기술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오용이 불러올 수 있는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로 남지 않을까 싶다.

ps. 원글에 달린 반응들 중에 한글 상태일 때와 영문 상태일 때 커서 모양을 다르게 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의견들이 보인다. 사실 90년대 후반 잠시 반짝했던 워드프로세서 중 삼성에서 만든 훈민정음에서 해당 기능을 지원했었다. 한글 상태면 커서가 검정색이었고, 영문 상태면 빨간색으로 나와서 한영 상태를 바로 알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 아이디어가 윈도우 자체나 다른 소프트웨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 매우 아쉽다. (혹시 특허가 걸려 있었을까?)

ps2. 찾아보니 아주 언론 기사까지 떴다. 잘들 놀고 있네 -_-


  1. IME는 단순히 키보드가 보내온 신호 그대로 입력받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중간에서 해석하여 적절한 자판 배치로 변환해주는 중간 프로그램이다. 보통 운영체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한글 환경에서는 한글 입력 상태와 영문 입력 상태를 인식하여 한글 입력 상태이면 두벌식·세벌식 등의 자판 배열에 따라 적절하게 글자 조합을 해준다. 

이런 기사가 났네요. “인터넷강국 초기입력창이 영문이라니” 국어문화원은 “인터넷 강국이라고 자부하는 우리가 한국 정부 기관의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입력하는데 영문이 적...

한글을 입력하거나 영문을 입력하다가 잘 못 입력해서 백스페이스키를 사정없이 눌러야 했던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컴퓨터를 사용하다 한/영 키를 전환하는 ...

입력기 기본 설정 글은 나도 역시 이정환닷컴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놀랐는데. 체계적인 해결보다는 편법을 강요하는 어투, 국어원의 진짜 공문 내용을 원치않게 왜곡했을 가능성, 제대로 근거를 자료에서 내지 않고 감성을 자극해 절대선을 만들어 악을 무찌르는 흉내를 낸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