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breakin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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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살아가기, 생각하기/즐기기

부모님 결혼 30주년 기념과 겸하여 대학원 들어온 후 제대로 쓰는 첫 휴가로 4박 5일 일정으로 일본 교토·오사카·나라 지역을 다녀왔다. 최근에 학회 출장 등으로 1년에 한번꼴로 캐나다, 포르투갈 등을 다녀오기는 했지만 자유여행으로 간 건 꽤 오랜만이다. 특히 일본은 우리나라의 애증의 관계를 가진 나라이면서 문화적으로 공유하는 부분도 매우 다른 부분도 함께 있기에 여러가지 느낀 점이 많았다.

디테일

이번에 일본 가서 가장 크게 바뀐 생각은 (조금 의외일지도 모르겠지만) 외벽을 타일로 만든 건물이 충분히 깨끗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카이스트의 하늘색 목욕탕 타일 건물(...)에 질려있는 대다수의 카이스트 사람들에게는 꽤 충격적인 소리로 들릴 수 있겠다.

일본에서 시내를 돌아다니다보면 철근콘크리트로 지은 건물들 중 타일을 쓴 경우를 매우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네 상가 건물 정도에서나 쓰는 정도이지만, 일본에서는 오사카 시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 중 하나인 우메다 스카이타워나 그 옆의 호텔 건물도 외벽의 상당 면적을 타일로 바를 정도로 타일 사용이 보편화되어 있다. 한국에서 타일 건물의 인상은 덕지덕지 붙여놓은 타일에 먼지가 빗물 타고 흐른 땟국물이 줄줄 자국이 남아서 매우 지저분하고 값싼 느낌인데, 일본의 타일 건물들은 타일을 붙인 것이 가히 예술의 경지다. 건축가인 아버지 말씀으로는 큰 건물의 경우 미리 공장에서 일정 사이즈의 판넬에 타일을 붙여서 그러한 판넬을 외벽에 붙이는 방식으로도 만든다고 하는데, 일단 타일 붙이기 자체가 거의 손으로 해야하는 작업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 섬세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타일을 붙일 때 각 타일의 네 귀퉁이가 표면으로부터 일정한 높이를 유지해야 울퉁불퉁해보이지 않고 멀리서 빛에 비춰진 옆면을 봤을 때 각각의 타일이 따로 놀지 않아 마치 하나의 거울 표면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데, 모든 타일 건물이 이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또한 벽돌도 마찬가지지만 타일을 붙일 때도 타일 사이의 가로세로 간격이 일정해야 아름다운데, 그 간격을 자로 잰 듯 일정하게 해서 전혀 어색함이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또한 건축가로서 타일을 외벽 재질로 쓰고 싶어도 한국에서는 건축주들의 인식도 안 좋은데다 이처럼 숙련된 타일시공 기술자들을 찾기가 어려워서 일본에 오면 이런 부분이 샘이 난다고까지 이야기하실 정도였다.

첫째날과 둘째날 묵었던 교토의 료칸 또한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소박한 목조 건물 느낌의 내부 인테리어에서 대단히 섬세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이사올 때 인테리어 공사를 했을 때 어머니의 가장 큰 불만 중 하나가 천장 몰딩이나 창틀·문틀과 벽면 벽지가 이루는 경계선들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점인데, 료칸의 벽지들은 정말 흠잡을 곳 하나 없이 모든 경계선과의 마무리가 아주 일정하고 깔끔했다. 나무 문짝도 그렇고 화장실 타일 붙여놓은 것도 그렇고 그동안 어머니가 한국에서 불만이었던 '철저한 마무리'의 가장 이상적인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디테일함은 비단 건축물들뿐만 아니라 각종 도구과 음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릇이나 젓가락, 각종 수공예품 또한 마찬가지고 일본음식이 보는 맛에 먹는다고 할 만큼 섬세하게 차려져나오는 것 또한 이 연장선 상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다른 섬세함의 의미로, 오사카 우메다역의 요도바시카메라(일본에서 가장 큰 전자백화점 체인)와 교토·오사타의 시장 골목을 구경하고 나서 느낀 점은, 물건을 만드는 것도 디테일하지만 물건을 모아놓고 파는 것도 디테일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젓가락만 전문으로 파는 가게가 있어서, 정말 몇백·몇천원짜리 값싼 젓가락부터 1세트에 70만원이 넘는 것까지 있는 식. 어떤 한 종류의 물건을 팔더라도 그 선택의 폭이 굉장히 넓고 깊다. 지팡이만 파는 가게는 마치 해리포터의 마법지팡이 가게를 생각나게 했다. 요도바시카메라에서는 이것저것 다 취급하는 카메라 매장들이 여러 개 모여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세세한 품목을 방대하게 취급하는 가게들이 모여있었다. 예를 들면, 카메라 삼각대만 파는 코너나 카메라를 어깨에 걸치는 끈만 파는 코너, 카메라 가방만 모아놓은 코너가 따로따로 있는데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했다.

이걸 보면서 딱 드는 생각이, 취미 생활 좀 하려면 일본이 정말 천국이겠구나 하는 것이다. 괜히 오타쿠의 나라가 아니지 싶다. 아주 일부의 모습만 봐도 이 정도인데, 각각의 세부 카테고리로 들어가면 얼마나 방대한 디테일들을 취급하고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매니아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는 것들은 뭔가 파는 곳이 없어서 구하기도 쉽지 않고 그럴 것 같은 느낌인데, 일본에서는 웬만한 건 다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요도바시카메라에서 카메라 메모리와 액자 틀을 조금 사고 계산하는데, 계산하던 점원이 우리가 외국인인 걸 알고 5% 부가세 면세적용을 해주겠다면서 여권 정보와 함께 구입 품목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카드를 작성하였다. 카드 양식을 굉장히 꼼꼼하게 하나하나 적고 한번 더 손가락으로 한글자 한글자 훑으면서 읽어보더니,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을 불러서 한번 더 확인을 시키고, 그 직원이 간 다음 다시 그 카드와 같은 크기로 구멍이 숭숭 뚫린 종이를 꺼내어 양식에 꼭 들어가야 하는 칸 중 빈 것이 없는지 확인까지 다 하고 나서야 계산이 끝났다. 단순히 친절한 것으로 보기에는 그 과정이 고민 없이 너무나 착착 진행되어 아마도 매뉴얼에 뭔가 이렇게 하라고 써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매뉴얼도 디테일하고 그걸 있는 그대로 지키는 직원도 디테일하다고 할 수밖에.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다소 조바심이 나기도 했지만 실수를 방지하기 위한 시스템이라는 점에서는 칭찬해주고 싶은 부분이다.

또 한 가지 디테일하다고 느낀 부분은 교통신호 체계다. 일본에서 자동차가 좌측통행을 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 생략하고(하지만 택시 탈 때 운전석 문을 열려고 해서 기사님들이 당황했던 적이 있는 건 사실.. 이래서 습관이 무서운 거다. ㅋㅋㅋ),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신호가 바뀔 때 약간의 시간 딜레이를 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A 방향 길과 B 방향 길 2개의 직선길이 만나는 교차로에서, A 방향에 빨간불이 들어와있고 B 방향에 초록불이 들어와있다가 신호가 바뀐다고 하자. 우리나라에서는 B 방향이 빨간불로 바뀜과 동시에 A 방향에 초록불이 들어오는데, 일본에서는 1~2초 가량의 지연 후 초록불이 들어온다. (이게 모든 지역에서 다 그러한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빨간불로 바뀔 때 노란불이 먼저 들어와 신호변경을 미리 알려주는 역할을 하지만, 그래도 추가적인 딜레이가 더 있는 것이다. 이것도 위와 마찬가지로 실수를 방지하는 일종의 안전장치 역할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는 어떻게 보면 융통성이 지나쳐서 문제인데 일본은 융통성이 너무 없어서 문제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철저함과 섬세함은 우리도 배워야 할 부분이다. 무언가 짓거나 만들 때 화려하진 않더라도 그 끝 마무리까지 완벽하고 깔끔하게 하는 것이, 겉으로만 화려하고 실제로 곰곰이 뜯어보면 대충대충 투성이인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는가. 일본인들의 이러한 부분만큼은 존경할 만하다.

철도의 왕국

기차든 전철이든 KTX든 우리나라에는 각 광역시별 지하철과 코레일만 알면 별다른 고민을 할 게 없고, 하나의 승차권이나 교통카드로 지하철끼리는 모두 환승이 가능하다. 그런데 일본은 철도의 종류가 굉장히 많았다. 우리가 이용한 노선만 해도 JR 야마토지선, 한큐 오사카·교토 구간, 킨테츠 나라선, 오사카 시교통위에서 운영하는 지하철까지 4가지 운영 주체가 따로 있었을 정도니 말이다. 각각이 독립적인 노선을 운영하고 있고, 우메다역이나 난바역 같은 곳은 2~3개의 전철 회사들이 각자 역을 운영하고 있어서 환승할 때도 헷갈리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게다가 승차권도 다 따로따로. (사실 관광객들을 위한 간사이-쓰루토 패스 같은 것들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이번 여행은 내가 미리 뭔가 조사하고 예약하고 그럴 시간이 없었기에 그냥 그때그때 표를 샀다. 그런 게 있다는 것도 나중에 안 거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전철로 되어있는데 전철의 속도도 우리나라보다 좀더 빠르게 운행하는 것 같다. 내가 탔던 노선들 대부분 시내 중심부에서는 지하로 가다가 교외지역으로 나가면 지상으로 나오게끔 되어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이른바 '철도 오타쿠'가 몇 있는데, 과연 그런 사람들이라면 일본은 또 다른 의미의 천국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처럼 한 종류의 지하철만 있는게 아니라, 각 사철(私鐵) 별로는 급행(걔네들은 '쾌속'이라고 표현함) 등의 차량 등급도 여러 가지고 열차에 앉는 방식도 지하철처럼 벽쪽으로 일렬 좌석이 있는 것부터 우리나라 무궁화·새마을 같은 것도 있고, 좌석 등받이 위치를 바꾸는 것도 새마을처럼 좌석 자체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등받이를 들어올려서 옮기는 식이라든지 다양한 방식들이 혼재하고 있었다.

한류와 역사문제

교토에 있었던 첫째날에는 청수사(기요미즈데라)를 둘러본 뒤 교토 시내의 골목을 돌아다녔는데, 료칸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서 관광객들 잘 가지 않는 동네 골목길을 지나가게 되었다. 어머니가 오랜만에 오래 걸으니까 발이 아프다고 하시면서 얇은 양말이나 스타킹을 샀으면 하셨는데, 마침 동네 수퍼마켓이 보여 들어갔다. 가게 주인과 동네 아줌마들이 앉아있었다. 이 사람들은 영어가 안 되니 손짓 발짓으로 어떻게 어떻게 찾아 구입하려는데,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하길래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싸이의 강남스타일부터 시작해서(...) 정우성, 빅뱅, 배용준 등등의 이야기가 줄줄줄...;; 역시 일본 아줌마들이 진짜 한류 팬이라더니 과연 허언이 아닌 듯.

하지만 여전히 역사문제에서는 아쉬운 점들이 보였다. 저녁 시간이면 료칸과 호텔에서 TV를 보았는데, 참 재미있기도 황당하기도 한 것은 한 채널에서는 한국드라마를 더빙 없이 일본어자막만 넣은 채 방송하고 있는데 바로 옆 채널에서는 '일한·일중 영토 분쟁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주제로 각계 전문가를 모셔놓고 토론회(...)를 하고 있더라는 것. 한국드라마에서도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어느 사극에서 반정을 모의하는 사대부 가의 대화 장면이 나왔을 때다. 명나라 사신이 오는데 왕을 바꿔치운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물어보자 대답하는 사람이 언제 우리가 걔네들 눈치를 보며 살았느냐 뭐 이런 대화를 하는데, 일본어 자막에 명나라를 명나라로 표현하지 않고 '종주국'이라는 한자 표현을 써놨다. 헐.... -_-; 우리말과 같은 뜻으로 쓴 것이라면 진짜 헐이다.

침체와 그늘

디테일한 부분은 정말 일본에서 배워야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일본의 어두운 모습들도 많이 보였다. 특히 길거리와 지하철 등에서 보는 지난 잃어버린 20년을 지내온 세대들(대략 내 나이또래부터 30대 후반 정도까지)의 모습들은 한결같이 우울하고 외로워보였다. 오히려 좀 나이 지긋하신 아저씨·할아버지·할머니들이나 관광지에 놀러온 유치원생·초중고 학생들은 밝고 명랑해보였는데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출퇴근 시간대 지하철을 타보면 직장인들이 피로에 쩔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단지 피곤해서 지쳐있는 모습과는 다른 무거운 공기가 느껴졌달까. 그 광경에서 관찰한 또다른 사실은 대부분의 직장인이 정말 한결같이 똑같은 검은색 정장바지에 하얀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더라는 점이다. 우리나라도 금융권 등 정장 입고 근무하는 회사들이 있지만, 일본은 그런 회사들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은 것 같고 동시에 정장바지와 와이셔츠 색깔의 variation 폭이 매우 적다. 처음엔 좀 섬뜩할 정도. 회사 로고가 박힌 뱃지들을 외투에 붙여서 서로를 구분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말로는 일본 회사들이 규율이 엄격하고 문화 자체가 서로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강하다는데, 아마도 그런 것들이 젊은 직장인들에게 상당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해 있었던 동일본 대지진 또한 일본사회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교외 지역을 달리다보면 광고 전광판을 꺼놓고 '절전운용중'이라는 표시를 붙여놓는다든지, 밤이 되었을 때도 가정집들이 전등을 거의 켜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하철에서는 '파이팅 일본' 이런 제목을 단 연예인 공연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NHK에서 저녁 뉴스가 끝나고 "내일로"라는 제목으로 각계각층 사람들이 한명씩 나와서 빨간색 꽃을 한송이씩 들고 노래 한 소절씩 돌아가며 부르다가 나중에는 함께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전체 해석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계속 살아갑시다, 꽃들이 피어요 이런 가사들이 보이고 추모하는 분위기와 제목, 설명 등으로 미루어볼 때 아마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침체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한 노력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약간은 집단주의적인 면도 보이는데, 각 개인은 사실 얼마든지 행복하고 밝게 살 수 있음에도 일본 사회가 처한 어려움을 마치 자신의 어려움과 동일시하는 듯한 분위기도 느껴졌다. 그 우울감은 여행 내내 일본을 짓누르고 있었다.

관광 이야기

첫째날과 둘째날은 교토에서, 셋째날은 오사카에서, 넷째날은 나라를 다녀왔고, 마지막날은 다시 오사카에 있었다. 교토에서는 청수사(기요미즈데라), 은각사와 금각사, 헤이안신궁, 유명 일본 건축가인 안도다다오의 '명화의 정원', 용안사의 석정 등을 보았고, 오사카에서는 오사카성 천수각과 해유관(가이유칸)을, 나라 가는 길에 담징의 금당벽화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5층 목탑이 있는 법륭사(호류지)를 보고 나라에서는 사슴공원과 동대사(도다이지)를 보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절은 은각사와 법륭사다. 은각사는 섬세함이 묻어나는 정원과 소박한 건물들의 느낌이 좋았고, 법륭사는 진짜 절 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점과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영향을 때문인지 건물의 처마·용마루 곡선이 한국의 것을 많이 닮아있어 그 편안한 느낌이 좋았다. 특히 법륭사의 5층 목탑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22줄짜리 일기장 6페이지를 가득 채워 기록으로 남겼던 KBS 황룡사 다큐멘터리에서 황룡사와 그 9층 목탑이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가장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지목된 건축물이기에 내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 담징의 금당벽화는 사실 제대로 들여다보기는 힘들었고 뒷편에 따로 조성된 박물관 코스에서 좀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법륭사의 5층 목탑에 사용되었던 부재가 함께 전시되어 역학적으로 지붕과 상단부를 어떻게 떠받치고 있는지 자세히 보여주는 것이 흥미로웠다. 경주 황룡사가 13세기 몽고침입 때 불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얼마나 멋있었을까.

용안사의 석정은 내 또래 세대에서 중고등학교 미술책을 봤다면 다들 알고있을 바로 그것. 일본식 정원의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소개되는데, 하얀 자갈에 살짝 패턴을 내고 조형물이라곤 중간에 몇개 놓여있는 돌이 전부인 정원이다. 그것이 바다 위의 섬들을 형상화한 것인지 아니면 무릉도원을 그린 것인지 그 해석은 각자에게 맡기고 있다. 나는 정원 뒷편의 울창한 숲과 기름을 넣어 지은 흙담에서 배어나온 자연스러운 무늬가 정원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더 멋있었다.

동대사는 16m 크기의 세계 최대 좌상 금동불상과 이를 보호하는 높이만 50m에 달하는 거대한 목조 대불당의 모습이 가히 스케일만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곳이었다. 나중에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최초의 대불당은 지금보다 더 컸었다고 하고, 양 옆으로는 그보다 더 높은 7층 목탑이 서 있었다고 한다. 지진 등으로 파괴되어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이것도 법륭사와 마찬가지로 삼국시대에 한국인들이 건너가 도움을 주고 지은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신사와 절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절은 말 그대로 우리나라의 절들처럼 불상을 모시고 스님들이 수행하는 그런 곳이고, 신사는 어떤 특정한 신(토착신앙으로 각 지방의 수호신일 수도 있고 특정한 주제를 나타내는 신일 수도 있고)을 모셔서 특정 지역을 수호하기 위한 염원을 담아 짓는 것이다. 헤이안 신궁의 경우는 수도를 교토에서 도쿄로 옮길 때 교토의 지속적인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내가 갔을 땐 그날 저녁 때 무슨 공연을 하는지 무대 설치가 한창이었는데, 뭔가 조심스럽고 신성한 느낌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경우에 따라서는 지역주민들을 위한 행사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는 것 같다. (한 가지 예외는 이세신궁이라 하여 일본 신화에서 우리의 단군과 비슷한 위치의 인물을 모신 신사가 있는데 거기는 별다른 건축물은 없지만 사진도 못 찍게 하는 등 굉장히 신성한 장소임을 강조한다고 한다.)

마치면서

전체적으로 여행을 마치고 든 생각은, 일본이 살아볼 만한 나라인데 지진만 안 나면 참 좋겠다는 것. 음식도 내가 다녀본 나라들 중 가장 깔끔한 편이었고 작은 상가건물 유리창들마저 반짝반짝 빛나는 그 깨끗한 거리와 전통·현대 건축물들의 정교함은 일본인들의 부지런함과 철두철미함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역사적으로도 우리 선조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던 나라이기도 하고. 하지만 최근 점점 우경화되는 정치 환경과 여전한 역사왜곡 문제, 그리고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사회적 우울감은 일본이 넘어서야 할 산일 것이다.

원래는 휴식의 개념으로 놀러가는 거였지만, 막상 NSDI 데드라인 후 텍스트큐브 저장소 github 이전 작업으로 거의 밤을 샌 다음 집에 운전해서 온 데다 제대로 뻗어서 자지도 못하고 12시간만에 짐싸서 비행기 타고 가려니 잠이 부족해서 좀 힘든 여행이었다. 생활리듬도 갑자기 바꿔야 했고. 그래도 규칙적으로 먹고 자고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는 시간이라 좋았다. 많이 걸어다녔더니 몸도 좀 건강해진 것 같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좀더 밝아진 일본의 모습을 보러 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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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준비하고 있던 논문은 "nShader"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PacketShader와 SSL Shader를 포함하여 임의의 새로운 네트워크 패킷 처리 기능을 하나의 소프트웨어 프레임워크 위에서 구현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단순히 프레임워크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scheduler를 바꿔가며 구현할 수 있도록 하고, 나름대로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용한 scheduler로 기존 shader 시리즈보다 성능을 더 향상시키는 것이 골자이다.

오늘 낮 12시가 NSDI 학회 데드라인이었는데, 결국 이건 아직 낼 때가 안 되었다는 결론을 내고 다음에 다른 학회에 내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몇 가지 느낀 점들을 적어본다.

꼼꼼한 기록의 중요성

시스템 연구는 특성상 삽질을 많이 하게 된다. 아무리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도, 모든 것을 처음 밑바닥부터 다 구현하는 것이 아닌데다, 아무래도 좀더 low-level을 만지다보니 일반적인 user-level application과 달리 어떤 기능의 정확한 동작과 성능에 영향을 주는 요소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 (kernel 버전이나 BIOS 설정까지도 포함, 코드 1줄만 바꿔도 성능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고, 등등.) 따라서 나중에 실험 재현을 위해서는 실험 환경에 대한 꼼꼼한 기록과 코드 버전 관리가 필수다.

이번 논문의 경우 처음 아이디어는 (지금은 영국에 가있는) 선배로부터 나온 것이다. 지난 1~2월에 빡시게 일해서 framework와 PacketShader/SSLShader 포팅을 이미 완료한 상황이었고, 나는 3월부터 5월까지는 수업 몰아듣기와 조교 및 APSys 논문 준비로 바빠서 일을 못했다. 또한 그 선배는 3월부터 영국에 가서 일하게 되었고, 내가 6~7월 APSys 행사 업무로 바쁜 사이 같이 실험 도와주던 분도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렇게 공백기가 있은 후 8월부터 본격적으로 논문 준비에 들어갔는데, 기록 미비로 인한 여러 문제점을 겪어야 했고 결국 이번에 바로 논문을 완성하지 못하는 한 이유가 되었다.

우선, 몇몇 실험의 기록과 코드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았다. 미국으로 간 분이 했던 실험을 조건을 바꿔서 다시 해볼 필요가 생겼는데, 실험의 최종 결과 그래프만 엑셀에 덩그러니 남아있고 어떤 서버(하드웨어)에서 했는지에 대한 기록과 실험 때 사용한 코드가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실험스크립트를 새로 짜야 했고, dictionary 자료구조라서 순서가 보장이 안 되는 항목을 index로 구분하게 해놓아서 실험 데이터의 x/y축이 뒤죽박죽이었다든가 하는 문제가 있었다. (다행히 그 실험의 경우엔 그래프 모양만 보고도 어느게 어느것에 해당하는지 알 수 있었지만.) 그래서 원래는 하루 예상했던 일이 거의 일주일이나 걸렸다. 미국과 시간대가 안 맞으니 계속 이메일과 카톡으로 비동기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했으니까.

그 다음은, 논리 전개에 대한 기록이 미비했다. 원래는 내가 2저자로 들어가고 영국으로 간 선배가 1저자가 될 예정이었으나, 그분도 영국에서 일하게 되면서 교수님과의 의논 끝에 이 논문에 필요한 실질적인 작업을 하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내가 1저자를 하기로 결정되었다. 1저자가 되었으니 당연히 논문의 모든 문장에 책임을 져야 하는 법. 그런데... 막상 중간 정도 쓰여있던 writing을 바탕으로 내가 writing을 시작하고 보니, 도대체 구체적으로 정의된 게 거의 없는 것이다. 특히 이 논문의 핵심 아이디어 중 하나는 'TCP congestion control과 유사한 방법으로 GPU offloading fraction을 조정했더니 성능이 잘 나오더라'인데, 실제로 일을 할 때는 '해보니까 잘 된다'였지 이걸 어떠어떠한 구체적인 근거가 있어서 그 방법을 선택했다는 logic이 없었던 것. 그러다보니 우리가 구현한 알고리즘에 사용된 각종 parameter의 값들도 죄다 magic number였고, 이는 그러한 magic number tuning 없이도 어느 조건에서나 최적 성능이 나온다라는 주장과 대치되는 것이다.

당장 코드 구현하고 실험해볼 때야 일단 잘 되면 좋은 것이지만, writing을 하는 입장이 되면 전혀 다르다. 다른 방법도 많은데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왜 그렇게 해서 잘 되는지를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어야 하고, 우리의 design decision에 대해서도, 우리가 생각한 technical challenge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scheduler가 light-weight해야 한다'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게 얼마나 light-weight해야 하는지는 context마다 다를 수 있다. '초당 1백만개 이상의 패킷과 그 패킷으로부터 생성된 task를 매번 scheduling해야 하므로 commodity server에서 자주 사용되는 xxx 모델급의 CPU 성능을 가정했을 때 300 CPU cycle 안에 돌아가야 한다'라든지 하는 식으로 밝혀줘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분도 10월초 한국에서의 결혼과 현지에서 작업하고 있는 다른 논문 준비 때문에 나와 커뮤니케이션을 충분히 미리 하지 못했다. 사실 그 선배 머릿속에는 '이런 이야기는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보여주면 충분할 것 같고, 이건 우리가 좀더 해봐야 하고, etc etc' 이런 로드맵이 있는 셈이었는데, 그게 논문에도 회의록에도 기록이 전혀 안 남아있었던 것. 그러다보니 한달만에 writing과 추가 실험을 모두 다 해야 하는 상황에서, full paper에서 요구되는 수준의 detail로 어떤어떤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파악만 겨우 했지 실제로 그 파악한 detail들을 모두 살펴보고 검증하고 실험 or 인용할 시간이 부족했다. 어떻게 보면 그 선배의 머릿속을 backtracking하느라 시간이 다 간 셈이랄까.

그렇다고 해서 그 선배를 탓할 생각은 전혀 없다. 사람이다보니 모든 일에 항상 최상의 퍼포먼스를 가지고 임할 수는 없는 일이고, 나 또한 이것만 하기에도 바쁘게 만든 여러 가지 다른 정황이 나를 더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writing만 하든지 실험만 하든지 서버관리만 하든지...

데드라인 3주 전, 연구실의 대표 웹·이메일 서버이자 모든 논문과 소스코드의 버전관리 저장소가 들어있는 an.kaist.ac.kr 서버의 하드디스크가 수명을 다해 죽었다. 다행히 RAID-1으로 미러링되어 있었는데, 문제는 과거에 서버관리하던 사람이 2가지 종류의 RAID 프로그램을 중복 설정해놨다는 것. 이 왜 그렇게 했는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에 대한 문서가 남아있지 않았다. 나름대로 로그도 뒤져보고 시스템관리자 커뮤니티에 질문도 해보고 그랬으나 실제 디스크 수준의 RAID가 둘 중 어느 것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둘 중 명령어로 상태가 정확하게 조회되는 하나를 찍어서 RAID rebuild를 해놓았고 이때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데드라인 2주 전, 연구실 서버룸의 에어컨이 수명을 다해 죽었다. 서버실 온도는 50도를 넘어갔고, an.kaist.ac.kr 서버의 아직 교체하지 않았던 다른 하드디스크도 과열로 마저 죽었다. 따라서 새로 미러링된 하드디스크를 다시 미러링하도록 설정하여 복구(?)했다. 연구실의 모든 선풍기를 동원하여 자연 냉방을 해야 했는데, 마침 죽은 날이 토요일이라 에어컨 A/S는 월요일에나 부를 수 있었고 점검 결과 컴프레셔 고장으로 수리비용이 교체비용과 비슷하게 나온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영국에 계신 교수님과 상의를 거쳐 에어컨을 새로 구입하기로 하였고, 중간에 우천으로 하루 연기된 것을 포함 결국 돌아오는 금요일(데드라인 5일 전)에 되어서야 설치가 완료되었다. 에어컨이 없는 동안은 서버를 켤 수 없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필수 서버만 켜두고 주로 논문 writing 작업을 했으나, 실험결과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문제에 직면했다.

그리하여 데드라인 4일 전이 되었는데, 연구실 서버룸의 에어컨 누전차단기가 수명을 다해 죽었다. 이제 이쯤 되면... 만성 멘붕이다. 토요일 밤에 학교 전기실 당직자를 불러 점검해보았고 결국 일요일에 교체. 근데 교체 과정에서 누전차단기의 입력전원을 차단하기 위해 서버실 전원을 모두 한번 내렸는데, an.kaist.ac.kr이 재부팅을 했더니 살아나지 않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이유는 2가지 종류의 RAID 중에서 disk level로 미러링하는 게 있고 partition level로 미러링하는 게 있었는데 후자로 서버를 살려놓았던 것. 근데 디스크 2개를 다 갈고 나니 파티션 테이블과 부팅 정보가 날아간 거다.;; 뭐... 굳이 잘못을 따진다면 불필요하게 헷갈리도록 RAID를 설치해놓은 전 관리자를 탓해야 하겠으나 이미 학교에 없는지 한참 된 사람이기도 하고 일단 논문을 쓰는 게 더 급한 상황이니 응급조치를 새로 설치 후 testdisk 프로그램 통해 수동 복구. 누전차단기 덕분에 데드라인 4일 전에 48시간을 고스란히 날렸다.

..이러니 논문이 나올 리가 있겠는가. ㅠㅠ

무엇보다 1~2주 전 사이에 멘붕이 심했는데, 사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벌어진 것 자체보다도 주변에서 나를 아무도 안 도와준다는 느낌이 들었던 게 더 큰 것 같다. 서버실 관리자도 따로 없어서 내가 혼자 관리하는 상황이고, 논문도 갑자기 1저자를 맡아서 마무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writing만 하기도 벅찬 걸 실험·코딩도 해야 하는데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다 영국에 있고. 뭐, 인터넷이 발달해서 메신저나 스카이프·구글 행아웃 등으로 연락을 하려면 할 수는 있지만, 소소하게 일상에서 힘든 부분 나누고 생각날 때마다 시시콜콜 물어보기는 아무래도 힘들다. 그쪽도 나름대로 다른 일들로 바빴고, 시차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니까.

원래 서버관리자는 이 논문 끝나고 뽑을 예정이었는데, 하필이면 데드라인 앞두고 일이 터진 건 그냥 운이 나쁜 거라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실험이나 코딩도 연구실에서 당장 후배를 가르쳐가면서 일을 하기에는 일단 1개월이라는 시간 자체가 그리 충분하지 않았던 것도 아쉽다.

To the next step

그래도 어쨌든 9페이지 분량의 논문을 쓰면서 진짜 제대로 된 12~14페이지 full paper가 되려면 어느 정도의 노력과 일의 양이 필요하겠구나라는 감은 좀 잡은 것 같다. 11월에 MSR 인턴을 가기 전에 다른 학회에 submit을 하는 게 목표인데, accept이 되든 안 되든 일단 내 스스로 봐서 만족할만한 논문을 쓰는 건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사실 교수님도 이미 데드라인 며칠 전부터 이번 논문은 힘들 거라는 걸 알고 계셨고, 나는 2주 전부터 이 상태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스스로 만족스러울 것 같지 않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물론 교수님이 끝까지 내자고 하셨으면 어떻게 냈을지도 모르지만 절대적으로 일의 양과 들인 시간이 모자른 건 무슨 수를 써도 메꿀 수 없는 법.

주변 사람들하고 얘기해보면, 사실 어느 정도 스스로 논문을 리드해서 작성할 수 있게 되려면 기본적으로 걸리는 시간이 있다고들 한다. 개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아직 나는 그 leap을 뛰어넘지 못한 상태인 듯. 이 정도 하면 되겠다라는 감은 생겼지만 실제 그 정도 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항상 예상보다 많이 걸린다. 그 간극을 극복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