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breakin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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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살아가기, 생각하기

전산학, 디자인, 건축.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요즘 듣는 수업들을 잘 정리해보니 결국 한 가지를 말하고 있었다. 잠시 시간을 내어 글로 기록하고자 한다.

송준화 교수님이 강의하시는 System Programming 수업을 들으면서, 정작 그 과목 내용보다는 전산학을 바라보는 자세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다. (프로젝트로 Linux Shell을 2주만에 짜라거나, 조그마한 cpu 아키텍처를 가지고 thread manager, application을 가지는 toy-os를 만들어오라고 했다거나 하는 빡센 숙제는 제외하고 말이다. -_-) 수업에서 누차 얘기하시는 그 교수님의 요점은 '전산학은 당구 배우듯 직접 부딪치면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점차 경험을 쌓아가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교수님 말씀처럼 전산학은 한 마디로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서비스 등을 협동 창작하는 일이다. 물론 그 와중에 알고리즘, DB, 분산 처리, 인공지능 등 갖가지 기술과 학문적인 내용들이 들어가긴 하나, 넓은 시각에서 바라봤을 때는 결국 근현대 이후의 디자인이나 건축과 같이 여러 사람이 하나의 목표를 이루어내는 작업이 된 것이다. (특히 컴퓨터를 디자인·설계하는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점을 원하시는 듯하다)

한편, 이건표 교수님이 강의하시는 디자인 문화와 기술이란 산디과 과목에서는, Design에 대해서 단순히 Fashion, Style, Drawing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획자, 마케터, 디자이너, 기술자, 소비자, 사회의 관점에서 제품 디자인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 궁극적으로 invent concept을 하려면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디자인의 역사를 다루면서, 과거에는 장인이 모든 것을 혼자 해결했지만, maker와 thinker(designer)가 분리되기 시작한 후로 cooperate design(소비자와의 협동이든 디자이너들 사이의 협동이든 제작자와의 협동이든..)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말하였다.

아버지가 건축가시기도 해서, 어렸을 때부터 관심을 많이 가졌던 것 중 하나는 단연 건축이다. 공학과 예술의 결합이라고 볼 수도 있고, '공간에 대한 디자인'이라는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협동 창작이라는 것이다. 작은 건물이나 기념물 등은 혼자 설계할 수도 있겠지만, 수주부터 시작하여 공법 선택, 구조역학적 설계, 전기·수도 배치, 인테리어, 외관 디자인, 적법성 검토, 안전 점검, 조경 등을 혼자 다 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전산학 또한 점점 복합적인 기능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서버측 프로그래밍, 웹클라이언트 프로그래밍, Database 등의 backend, GUI 설계, 통신과 동기화, 대용량 서버 및 분산 처리 기술, 검색, cross-platform, XML 등 수많은 분야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고 있다. 역시 이를 한 사람이 다 마스터하기도 힘들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주어진 시간 내에 혼자서 모든 작업을 다 완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바이오정보전자개론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이야기지만, 앞으로는 점점 학문 간 융합이 추진될 것이며, 어느 한 학문만 깊이 알고 있는 것보다는, 다양한 학문에 대한 소양을 가지고 이들을 잘 조합해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능력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위에서 말했던 것들을 대체로 내가 관심 있는 분야들이다. (추가하자면 로봇 공학 등이 더 있겠다. 역시 기계공학, 전자공학, 전산학 융합의 결과다.)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잘 이해하고 내가 원하는 바를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의사 소통이다.

헌데, 이 의사소통을 잘 하는 사람을 아직 찾지 못했다. 물론 나 자신도 잘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문제를 특히 느꼈던 건 지난 겨울방학 때 진행했던 OCO 프로젝트와 경기과학고 홈페이지 프로젝트였다.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등을 서로 보완해주어야 하는데, 각자가 잘 모르고 있었다. 그 결과는 경기과학고 홈페이지의 스파게티 코드와 실패였다. (OCO의 경우는 훨씬 낫지만, 초창기 개발 단계에서 다른 사람들이 컨셉을 잘 이해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그나마 의사 소통 문제가 가장 적었던 경우는, 친구 준호와 진행했던 과학전람회 및 휴먼테크 논문 준비 과정이었다. 그 녀석은 물리와 말로 설명하기를 잘 했고, 나는 프로그래밍과 글로 설명하기를 잘 했다. 주제는 음향·물리 쪽이었지만, 그런 서로의 상보적인 능력과 잘 통하는 의사소통으로 큰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론적인 계산이나 고찰, 그리고 발표는 준호가 맡았고, 나는 실제 실험 데이터를 분석할 때 프로그래밍 실력을 발휘하고 논문을 작성했다. (준호가 발표를 조금 더 잘하긴 했지만 나도 발표를 잘 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서로가 편한 것도 있었고, 발표력을 바탕으로 서로의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진 것 같다)

아마도, 앞으로 나와 같은 공학도·과학도들은 살면서 이러한 의사소통 문제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겠지만, 진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고 직간접적인 경험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매우 크게 다가오는 이야기다. 얼마 전 바이오시스템학과에 가기로 한 한 친구와 점심을 먹은 적이 있다. 이야기하면서 관심사가 상당히 비슷함을 알 수 있었는데, 그 아이도 결국 앞으로는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의사소통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생물 쪽으로 공부를 했던 친구인데, 내가 전산을 잘 하면서 생물 쪽도 잘 이해하는 게 한편으론 부러운 모양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고등학교 선생님들께 매우 감사한다. 생물을 너무 빡세게 배워놓아서, 어지간한 내용은 거의 다 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생각들을 종합해보면, 다양성에 대한 이해, 통찰력에서 나오는 창의성, 그 모든 것을 받쳐주는 의사소통 능력—앞으로는 이것들이 과학도·공학도로서의 삶에 대한 키워드가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