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breakin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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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마도 가장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 이브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 외국에서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인데다 영국 킹스칼리지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에 직접 참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아래 동영상부터 보시라.

2011년도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 녹화 영상 (by CloseLineProjects)

오늘 나는 저기서 솔로로 부르는 첫 장면을 불과 10m 앞에서 봤다. 이건 작년 동영상인데, 제대 쪽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가능했던 이유는 이렇다: 동서로 길쭉한 킹스칼리지 채플의 구조에서 제대와 가까운 자리(east side)는 100여석 정도, (화면에는 나오지 않지만) 제대가 가운데쪽에서만 조금 보이도록 가려진 중앙 오르간 벽 뒷편(west side)에는 600석 정도의 자리가 제공된다. 줄선 순서대로 입장하기 때문에 제대 근처에 앉으려면 새벽부터 일찍 줄서야 하는데, 나는 오전 8시 40분에 갔음에도 이미 자리 배정 인원의 거의 끝부분이었다. 그래서 합창단을 직접 보는 건 포기하고 있었는데, 위의 작년 동영상과 달리, 올해는 합창단의 입장 성가를 제대 쪽이 아닌 맨 뒤쪽에서 시작하였다! 운 좋게도 맨 첫곡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추가] 나중에 찾아보니 TV용으로는 따로 녹화를 미리 해두고 여기는 좀더 잘 알려진 캐롤들이 들어가는 듯. 오늘 예배 때는 현대적인(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캐롤들이었다. 시작 곡은 같으나 입장 방향과 곡 구성이 다른 것.

기다리는 줄에서 우리 일행 뒤에 어떤 아저씨와 그분 아들이 있었다. 교수님이 말을 붙이셔서 함께 이야기하다 알았는데, 그 아들이 얼마 전까지 합창단에 있다가 변성기로 지금은 합창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여기 합창단은 7살부터 들어갈 수 있는데 기숙학교(boarding school)로 학업과 합창연습을 병행하고, 변성기가 오면 합창에서는 빠지지만 학교에는 계속 머물 수 있다고 한다. 그 아이는 합창단 친구들이며 줄선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들이 많은지 인사한다고 계속 왔다갔다 했다. 지금 나와있는 합창단 CD에 그 아이도 참여했다고 하고, 아마 최근의 동영상 등에도 모두 함께 불렀을 듯. 작년쯤인가 한국 소년이 여기 들어갔다고 해서 뉴스에 잠깐 떴던 것 같은데 그 친구도 알고 있었다. (위에 동영상 틀어놓고 글쓰면서 보니까 그 한국학생도 중간중간 나온다. 오늘 본 학생은 동영상에서 한국학생과 마주보는, 제대 방향 바라봤을 때 왼편 첫줄 중간쯤에 안경낀 학생 같은데... 맞나 모르겠다)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낮 12시쯤 돌아다니면서 노래하는 한 그룹의 합창단원들. (직찍)

아래 팁에도 적었지만, 제대와 가까운 안쪽 자리에는 들어가지 못했어도 여전히 소리 울림은 너무 멋있었다. 동영상이나 음악으로만 듣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꼭 이런 '클래시컬'한 음악이 아니더라도 음반도 들어보고 같은 곡의 라이브 공연을 가본 사람들은 아마 그 차이가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그리고 동영상은 어느 정도 편집된 거라 같이 부르는 소리보다 합창단 소리 위주로 들려주는 것 같은데, 실제로 사람들이 다함께 부를 때 채플 전체가 울리는 그 느낌은 가서 불러봐야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노래의 장르가 이 소년합창단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지만(그래도 동영상의 몇몇 곡은 실제로 현대식 버전으로 부르기도 함), 나름대로 성당에서 청년성가대로 활동하고 이런저런 특송이나 공연에 참여해본 나로서는 더욱 특별한 경험이었다. 노래를 듣는 것도 멋지지만, 실제로 부를 때 자신의 음역 파트에서 소리가 맞아들어가면서 스스로 흡입될 때의 그 희열 또한 멋진 경험이기 때문이다. 첫 곡의 시작 솔로를 맡은 아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느꼈을 때, 그리고 다함께 부르기 시작하면서 각 파트가 제 자리를 찾고 목소리가 안정됨을 느꼈을 때 그 부르는 아이들의 심정이 어떠할지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 많은 시간 연습하면서 힘들기도 하겠지만, 합창을 제대로 해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경험이 아닐런지. 솔로로 연주하거나 노래 부를 때와는 다른, 합창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다른 부분들이 분명 있다. 가족들이나 성가대 사람들과도 함께 보았다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그 점은 아쉬울 뿐이다.

사실 이번 크리스마스 때 어디 여행이라도 갈까 하다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도 있고 이번엔 좀 조용히 쉬는 크리스마스가 되었으면 해서 캠브리지에 머물고 있는데, 다른 인턴 친구들은 다들 햇빛의 땅(...) 캘리포니아로 가족들 만나러 유럽 대륙으로 떠나서 조금 썰렁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예배 참석 한방으로 그 모든 썰렁함을 날려버리고 합창에 대핸 여운이 꽤 오래 갈 것 같다.

참석자 Tips

  • 기본 정보 : 예배시간은 오후 3시부터 약 1시간 반 동안 진행, 입장은 오후 1시반부터
    • 입장료는 없으나 끝나고 채플 관리·보존 비용 명목으로 자유 기부 형식의 헌금(retiring collection)을 받는다.
    • 예배 진행 순서는 시작 성가, 간단한 시작 강론과 주기도문 낭송, 예수님 탄생과 관련된 9개의 성경구절 낭독(기독교 신자라면 다들 알 만한 그것들)과 각 구절의 내용을 표현하는 캐롤들(구절별로 1~2개), 간단한 마침기도와 마침성가 다 함께 부르기로 이어진다.
  • 채플 내부 입장이 가능하려면 일단 오전 9시까지는 줄서야 한다. 이것이 최소 조건. 다만... 간혹 아주 늦게 온 경우라도 일단은 입장 불가라고 했다가 실제 입장시킨 후 자리가 있으면 30여명 정도는 더 들여보내주는 경우가 있다. 오늘 미국서 오신 교수님 일행 중에 비행 시차 때문에 늦게 일어나신 분들이 있었는데 다행히 이런 방법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 줄 설 때 있으면 좋은 것들 : 따뜻한 옷, 크고 튼튼한 우산(영국은 겨울에 비가 자주 온다), 접이식 의자, 보온병에 담은 따뜻한 음료(차 등), 1명 이상의 일행(화장실 다녀오거나 중간에 점심 먹으러 왔다갔다 할 때 자리 맡고 있을 수 있음), 요깃거리가 될 수 있는 초코렛바, 긴 시간 기다리기 위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야기거리나 읽을거리 등. 앞뒤 사람들하고 말 붙여서 얘기하는 것도 좋다.
    • 영국은 줄서는 문화가 잘 정착된 곳이다. 일행이 여러 명인데 1명만 와서 자리 맡아놓고 끼어들고 이런 건 아무래도 사람들이 안 좋아하고 안내문에도 그렇게 하지 말라고 써있다. 하지만 2~3명 와있고 1명 정도 늦어서 합류하는 정도는 별 문제 없는 듯. (사실 우리가 줄의 끝부분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ㅋㅋ)
    • 킹스칼리지 내에 카페와 화장실은 잘 마련되어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됨. 접이식 의자가 없다면 일행 보고 자리 맡게 해놓고 돌아가면서 카페 같은 데서 쉬다 와도 된다. (처음 줄서러 들어올 때 나눠주는 안내문 종이가 일종의 티켓 역할을 하므로 외부로 드나들 때는 이걸 보여줘야 한다.) 다만 입장시간이 가까워오면 여자화장실 줄이 매우 길어지므로 여성분들은 미리미리 일을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입장 후(특히 예배 시작 후)에는 화장실에 갈 수 없다.
  • 합창단이나 예배 진행이 보이지 않는 오르간 뒷편 자리(west side)에 앉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여기서는 아예 뒤쪽 자리에 앉는 게 소리 울림을 듣기에는 더 좋다. 교수님이 합창단 공연을 보러 오신 적이 있었는데 west side 앞쪽 자리에 앉았더니 소리가 잘 안들리더라 하는 말씀을 하신 걸 보면 말이다. 성경 낭독은 잘 들리지 않지만 팜플렛이 제공되므로 따라가는 데는 문제 없고, 노래는 아주 잘 들리니 걱정 안 해도 됨. 그리고 내가 전에 토요예배에서 east side에 앉아본 바로는 마주보는 자리 배치 때문에 제대 쪽에 앉는다고 딱히 합창단을 직접 보기 편한 것도 아니다.
  • 예배는 영국 전역에 BBC 라디오로 생중계된다. 기침하면 다 들린다고 함... 곡 중간에 기침한 경우는 없었던 것 같고 곡 끝난 후나 성경낭독 타이밍에 기침하는 사람들은 좀 있었다. 집중해서 듣기 굉장히 좋다.
  • 시작 곡은 항상 같은 것 같지만, 중간중간 부르는 캐롤들은 매년 바뀐다. 오늘 내가 들은 캐롤들도 위의 동영상과는 많이 달랐다. 또한 시작 곡의 3~6절은 모든 사람이 함께 따라부르게 되어있었다. (동영상처럼 1절은 솔로, 2절은 합창단만 부름) 같이 부르는 것 또한 굉장한 경험이다.

ps. 페이스북에도 적었지만, 이거 함께 보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줄서서 말동무하며 기다려주신 교수님과 교수님 사촌동생분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