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breakin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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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살아가기, 생각하기

한국은 이미 2013년이 되었지만 이번엔 특별히 내가 GMT 시간대에 있는 관계로 이제야 회고 포스팅을 한다. 오늘 저녁에는 건이형 부부와 교수님, MSRC 인턴 친구들과 함께 건이형의 생일파티 겸 New Year's Eve 파티가 있는 관계로 잠시 캠브리지 시내에 들렀다가 스타벅스에 앉아있다.

올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멘붕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2월에 석사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졸업논문을 어쨌거나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과 건이형과 함께 두달 동안 기숙사를 같이 쓰면서 열혈코딩 달리던 재미로 괜찮았는데, 봄학기 시작하고 수업 몰아듣기 + 조교, APSys 워크샵 논문 제출로 슬슬 정신없어지기 시작하더니 여름의 절반은 APSys 워크샵 관련 업무로 정신을 못 차렸고, 후반에 가서야 nShader 논문 좀 쓴다고 끄적끄적했는데 서버관리를 도와줄 사람이 일시적으로 없었던 상황에서 때마침 NSDI 데드라인 앞두고 서버실 에어컨 고장과 메인 서버 하드 사망 등의 여파로 멘붕...

즐거웠던 일은 글로벌박사펠로우십에 선정된 것(나도 기분이 좋았지만 교수님이 그렇게 기뻐하시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APSys 워크샵에서 논문을 발표해본 경험과 힘들기는 했지만 APSys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다녀온 일본여행을 들 수 있겠다. 캠브리지에서의 Microsoft Research 인턴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므로 평가는 생략. 일단 내게는 가을에 이어진 멘붕 끝에 모든 걸 내려놓고(?) 나름대로 잡무를 떠나 연구에만 집중하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기간이 되고 있다. MSR의 뛰어난 연구자들과 열심히 일하는 다른 학생들을 보면서 새로운 자극을 받는다. 캠브리지 대학 전산과의 happy hour 행사에 갔다가 APSys로 알게된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APSys 업무로 힘들었던 것에 대한 하나의 작은 보상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영국 캠브리지라는 새로운 환경에 와있으면서, 교수님과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몇번 있었다. 한국에서 그냥 힘들게 살았으면 오히려 그럴 기회가 없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교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끌어가는 게 나에게도 교수님에게도 좋을지 조금은 더 잘 알게 된 것 같다. 또한 좋은 연구를 하기 위해서, 좋은 연구자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내 자신을 바꿔나가야 할지, 또한 내가 박사 연구의 로드맵을 어떻게 잡을지 다시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계속 삽질하고 정신없이 따라가는 데만 바쁘다가, 갑자기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이제 내가 무엇무엇을 언제언제를 목표로 삼아 어떻게 진행하면 되겠다라는 것이 갑자기 안개가 걷히듯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일이라는 게 막상 하다보면 한계에 부딪힐 수도 있고 또다시 멘붕과 좌절을 겪게 되겠지만, 지향점이 보이는 것과 아닌 것은 차이가 크니까.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도 2012년은 아주 특별한 한 해였다. 부모님의 결혼 30주년이자, 하나뿐인 형제인 인기형이 3월에 결혼했고, 불과 열흘 전에 첫 조카(딸)을 낳았다. 와인 5병을 까고 형 결혼식 다음날 술병이 날 정도로 아버지와 함께 긴긴 밤 술잔을 기울여본 것도 처음이었다. 이렇게 부모님은 할아버지·할머니(...)가 되었고 형은 아빠가 되었다. 드디어 우리들 다음의 새로운 세대로 이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 또한 회사의 최고경영자가 된 이후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리며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도 일을 잘 해나가고 계시고, 형도 회사에 들어온 후 발목을 잡고 있던 대학원 졸업논문을 무사히 마무리하는 등 여러모로 기쁜 일이 많았다. 그리고 이 모든 가운데 어머니가 기도의 힘으로 윤활유 역할을 잘 하고 계심은 물론이다. 옛날에는 부모님이 무조건 아끼고 희생하는 그런 모습을 더 많이 발견했다면 이제는 점점 더 본인들의 삶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기쁘다.

내 개인사를 떠나서 내가 관심있는 다른 분야들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잡스가 떠난 애플의 많은 부분이 변화하고 있고(이것이 궁극적으로 좋은 방향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페이스북의 IPO는 사실상 실패나 다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8을 출시했고, 때가 좀 늦긴 했어도 모바일 시장을 적극 공략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최초의 유색인종 대통령인 버락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했고, 한국에서는 제18대 대통령선거를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가 선출되어 최초의 여성대통령 탄생을 앞두고 있다. 여러 이유로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아쉬운 일이 되었지만, 사회이슈와 해결방안이 도마에 올라 그걸 논의하고 민의를 살필 수 있는 자유선거가 있다는 점은 여전히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점점 불안해지는 고용환경과 대기업에 유리한 사회구조는 앞으로도 큰 짐이 될 것이다. 정치문제들이 딱 정해진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기에 한번에 사회를 바꾸기는 어렵지만, 박원순 서울시장이 추진하는 여러 정책들을 보면서 그래도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한 역동성이 꾸준히 관찰된다는 점에서 한국의 미래는 여전히 밝다고 생각한다.

2013년 한해는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조금 더 성숙하고, 멘붕에 무너지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을 함께 밝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사람이 행복한 것은 점점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고 그것을 점진적으로 확인할 때라고 한다. 이제는 한발짝 더 앞으로 나아갈 때다.